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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30년의 선율, 컨트리 뮤직의 명소 팔로미노
  • 담당부서 공보관실
  • 작성일 2014-01-09

☞ 이 글은 이츠대전TV 블로그 작가단의 글입니다. 대전시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츠대전TV '대전원도심이야기'

글쓴이 : 명창현 방송작가


30년의 선율, 컨트리 뮤직의 명소 팔로미노



여러 가수 지망생이 노래했던 라이브 명소이자, 당시는 드물게 탄노이 스피커가 있던 곳, 그런 팔로미노의 주인이며 컨트리 가수, 그리고 대흥동의 오랜 터줏대감, 그가 바로 이정명이다. 그를 통해 대전에서는 컨트리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고, 내쉬빌이라는 지명 또한 그를 통해 처음 들은 이들이 많았다.



이광조, 신촌블루스의 엄인호도 90년대 초반까지 이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뿐만 아니라 이문세, 4월과 5월, 어니언스, 해바라기, 한마음 등의 보컬과 그룹이 지방방송 출연이나 공연을 오면 팔로미노를 들렸다. 팔로미노는 가수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대전시민들이 여러 유명가수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자 대중음악을 널리 알린 창구와도 같았다.



지금도 팔로미노에서는 여러 장르의 모임이 이어지고 있다. 시를 쓰는 작가들이 담소를 나누고 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시낭송인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도 간간이 이곳에서 예술세계를 나누고 있다. 1983년 꾸며진 팔로미노가 격랑의 시대적 흐름과 다양한 문화변동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음악과 예술을 좋아하는 원도심 사람들과 함께 30년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팔로미노 레코드기



컨트리 음악과 내쉬빌



컨트리 음악은 한 마디로 미국 백인들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소울이나 리듬 앤 브루스, 재즈가 흑인들로 부터 시작되었다면, 컨트리 음악은 미국 남동부의 민속 음악이 그 출발점이다. 1930년대 캘리포니아 남부를 중심으로 한 Western Swing과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인기였던 할리우드 서부영화와 함께 발달한 카우보이 음악, 그리고 힐빌리 음악을 통칭해서 “Country & Western”으로 부르다가 나중엔 컨트리로 통일해서 불렀다고 한다.



컨트리의 본고장 하면 미국 테네시주 내쉬빌을 꼽을 수 있는데 1925년에 내쉬빌에서 설립된 무대 “그랜드 올 오프리” 무대가 펼쳐지면서 컨트리 팝, 컨트리 록 등의 컨트리 음악이 성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명국환의 “아리조나 카우보이”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서수남 하청일의 번안곡 “팔도유람” 요들송으로 유명한 김홍철의 노래 등을 컨트리로 꼽을 수 있다. 사실 넓은 의미로 보면 육 칠십년대부터 유행했던 포크송도 컨트리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80년대 국내 컨트리 음악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981년 이정명이라는 젊은 가수가 컨트리 음악의 심장부 미국 내쉬빌의 콘테스트, MCF에서 자신이 만든 노래 “심프슨 부인의 늦사랑(Mrs. Simpson's Late Love)"이란 노래로 작곡부문 수상을 한 것이다.



그는 이 노래 하나로 국내 컨트리계의 대표가수가 되어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내쉬빌 작곡가협회” 준회원과 정회원을 거쳐 평생회원이 되었고 지금까지 3집 앨범을 발표 했다. 현재 국내 컨트리 뮤직 계열 뮤지션 중에서 인정받는 싱어 송 라이터로 활동하는 것은 물론 대전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여전히 대흥동을 지키고 있는 팔로미노에서 이정명씨를 만나 옛날 이야기를 나누었다.



“컨트리 음악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구요. 아마도 운명적으로 이 장르가 나한테 오지 않았나 싶어요. 1977년 78년 계속 음악을 하는 과정에서 내가 주로 하게 되고 잘 하는 게 컨트리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운명이다 이렇게 믿고 본격적으로 해왔던 거죠.”



청소년기에 음악을 무척 좋아했던 이정명씨는 대개의 10대 청소년들처럼 팝을 심취해서 들었다.



“남의 나라 음악을 한참 듣다보니까 우리나라 대중 음악도 세계에 역수출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미국 내쉬빌에 곡을 테이프로 보냈죠. 내쉬빌에 프로덕션이 여러 군데가 있는데 마침 한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모세 주니어’ 라는 분이 내쉬빌 팝 페스티벌이 있으니까 거기 참석해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거기에 가게 되고, 수상을 하게 됐던 거죠. 생각해보면 생면부지의 모세 주니어란 그분이 무척 고맙죠.”



이 도시에서 열린 가요제에서 작곡부문을 수상한 이정명씨는 우리나라 음악계의 화제로 떠올랐고 당시 KBS 9시 뉴스에서도 이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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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심의 추억



대전에서 자란 이정명씨는 그 누구보다 원도심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고 했다. 옛 충남도청 앞 삼성생명 건물이 서 잇는 자리에는 소달구지 지나가고, 비만 오면 대전천에 산채로 돼지와 소가 떠내려가던 모습도 아련하다고 했다. 지금의 팔로미노 자리 앞에는 개천이 지나갔는데 지금은 복개가 돼 냇물의 흔적은 추억 속에 남아있는 형편이다.



“어머니가 남도창을 하시는 국악인이었는데 당시에 묘향 여관을 운영했었죠. 그때 예술하시는 분들이 여관에 많이 오셨죠. 연정 국악원으로 유명한 연정 선생님도 우리 집에 자주 오셨는데, 오시면 인사 드리고 그랬죠. 묘향여관의 묘향은 어머니 호예요.”



이정명씨가 원도심과 인연을 맺고 음악적 영감을 얻은 것은 어머니가 운영한 묘향여관 덕분이었다. 그 당시 묘향여관에서는 전국의 예술가들이 숙박을 하면서 작품을 만들기도 했었고 밤늦도록 예술가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공간이었다. 즉석에서 마당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예술적 교감을 나누는 예술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정명씨는 자신도 모르게 꿈을 꾼 지도 모른다. 그가 음악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팔로미노를 만든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묘향여관이라는 예술인 교류의 장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근데 어머니가 남도창 하시던 분이라 팝을 하겠다는 아들과 당연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처음엔 그냥 그러나보다 하다가 제가 본격적으로 컨추리를 하니까, 어느날 어머니가 컨추리 뮤직 잡지를 다 버렸어요. 어머니가 화를 내시던 건 지금 기억하죠. 사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자식이 직장도 안다니고 음악을 한다면 인정하기가 쉽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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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을 컨트리 명소로 만들고 싶다



“지방마다 그 지역의 문화가 있고 특성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뮌헨은 판화가 세계 최고이고 . 부산하면 영화가 떠오르잖아요. 요즘 지방자치단체에서 이것 저것 사업을 많이 하는데, 물론 많이 하면 좋긴 하죠. 하지만 자신있게 내세울 메인 한 가지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대전은 컨트리 음악도시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컨트리 음악인으로 당연한 바람인지 모른다. 컨트리 음악 환경이 얼마나 조성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도시에만 있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갈망은 대단했다.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서 손님들이 오면 많은 사람들이 진로집에 갑니다 1964년 생긴 진로집은 두부두루치기로 유명하잖아요. 대전의 향토 음식이라고 불러도 지나치고 않죠. 이렇게 상징적인 것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재즈는 뉴올리언스로 유명하고 또 멤피스는 R&B로 알려져 있잖아요. 이렇게 대전을 컨트리 음악도시로 만들고 싶은 게 꿈입니다. 대전에 미국 내쉬빌의 유명 공연장인 ‘그랜드 올 오프리’와 같은 공간을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지금도 외국친구들에게 대전을 내쉬빌이라는 지명을 따 와 대전빌이라고 소개를 할 때가 있어요.”



이런 음악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인프라도 적지 않다, 중요한 것은 꾸준하게 공연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정명씨는 충무체육관이나 지금은 사라진 시민회관에서 이뤄진 수많은 공연을 의미있게 생각한다. 관객이 얼마 오는지 연연해 하지 말고 꾸준하게 공연을 열어야 음악도시의 환경을 갖춰나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팔로미노 같은 공간이외에서 자체공연이 많이 열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영원하라 팔로미노



팔로미노는 말의 색깔에 따른 유형을 뜻하는 단어다. 털색이 크림색·노란색·금색이고 갈기와 꼬리가 흰색이나 은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1941년 생긴 미국 팔로미노 말 사육자 협회와 1936년에 생긴 팔로미노 말 협회에서 팔로미노를 등록하고 있다.



그의 사진 중에서 유독 카우보이 모자를 찍은 사진이 많은 것을 보면서 팔로미노라는 말을연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카페 이름을 팔로미노로 정한 것은 미국이나 캐나다에 있는 컨트리 음악클럽들이 팔로미노라는 이름을 즐겨 쓰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나라 컨트리 음악의 산실이자 메카로 만들고 싶어 팔로미노라는 이름으로 카페를 열었던 것이다.



2013년, 팔로미노가 30년을 맞았다. 창업 30년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고, 컨트리 음악 보급 30년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팔로미노. 그의 카페에서 30년 역사의 흔적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오래된 레코드 판은 여전히 아날로그의 감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30년 전 쓰던 탁자는 몇 개는 지금도 남아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컨트리 뮤직을 이어갈지는 알 수 없는 법, 다만 그의 음악열정이 살아있는 한 그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외지에서 대전에 오는 가수들은 지금도 팔로미노 와서 담소 나누고 가고 그래요. 일종의 아지트 커피숍이라고 할 수 있죠. 30년 된 테이블이 많은 분들의 향수를 자극하지 않나 싶어요. 일종의 노스탤지어라고나 할까요.”



이츠대전TV '대전원도심이야기' 취재블로거 명창현 방송작가

원본 콘텐츠 :
대전시인터넷방송 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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