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기신양복점, 그 시절 화양연화에 대하여
- 담당부서 공보관
- 작성일 2014-07-18
아찔하게 잘 빠진 장만옥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해준 치파오(중국 여성의 전통의상), 앙코르 와트 어느 사원의 담벼락 구멍에 파묻듯 얼굴을 대고 비밀스런 사랑을 봉인하고 돌아서던 양조위의 울 듯한 얼굴, 영화에 흐르던 탱고음악 ‘Quizas Quizas, Quizas'.
영화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오래된 양복점에서 그 영화 ‘화양연화’가 떠올랐습니다. 얼마 전 그 영화를 다시 본 까닭이었을까요? ‘인생에 있어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때‘ 라는 제목에 담긴 뜻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창 잘 나갈 때는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양복을 만들었지. 여기 1층에선 쉴새 없이 치수를 재고 재단하고 2층 공장엔 직원이 40명이나 되었어. 한달에 3백벌도 짓고 했으니 밤샘도 자주 했지. 우리집 양복이 대전 시내에서 가장 비쌌는데도 손님들이 끊이질 않았어. 시장, 군수, 교육감, 운동선수 등 단골이 많았어. 염홍철 시장님도 우리집 옷 입으시고.”
과거 얘기를 시작하는 기신양복점, 30년 경력의 양복 재단사 원성현씨의 입가엔 내내 엷은 미소가 감돌았습니다. 그 시절은 분명 67년 전통 기신양복점의, 또한 일급 재단사로서 한껏 솜씨를 날렸던 그의 화양연화였을 것입니다.
[기신양복점의 현재 모습]
[1947년 당시 기신양복점, 오른쪽 상단은 1대 사장 김현갑씨(90세)]
기신양복점은 터 기, 믿을 신, 믿을만한 곳, 믿을 수 있는 양복을 만든다는 뜻이 담겨진 이름입니다. 충남 부여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1대 사장 김현갑씨가 1947년 대전역 앞,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은 후, 1978년 아들인 김근배 대표(인터뷰엔 자리하지 못했다) 가 물려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전역 앞 역전통에 자리한 위치 때문에 서산, 예산, 멀리 전라도 무주, 군산에서도 손님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한때는 패션의 중심지 서울 명동에 분점까지 있었다니 한강 이남에서 제일 잘 나갔던 양복점이었다는 말이 실감이 갑니다.
[2대 사장인 김근배씨와 30년 넘는 세월을 함께 해 온 기신의 산증인, 실무담당 홍석만씨(왼쪽)와 재단사 원성현씨(오른쪽). 늘 가게에선 깔끔한 와이셔츠 차림으로 일한다]
한때는 대전역에서 (구)동양백화점까지 양복점이 스무군데도 넘을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대학 입학이 가문의 영광이자 동네 자랑이던 시절, 대학입학 기념으로 제 이름 석자가 안쪽에 새겨진 양복 한 벌을 선물받기도 했고 취직 시험 보러 갈 때, 혹은 맞선 보러 갈 때, 그리고 결혼식을 앞두곤 필수로 들러야 할 곳이 바로 양복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남자 인생의 중요한 순간엔 몸에 잘 맞는 한 벌의 양복이 날개를 달아줬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이제 언제든 돈만 들고 가면 30분 안에도 사 입을 수 있는 게 양복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성 양복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또 IMF의 고개를 넘으면서 하나둘 맞춤 양복점이 문을 닫거나 업종 변경을 하며 사라져갔습니다. 결과적으로 기신양복점이 대전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집으로 명맥을 잇고 있는 셈. 다른 양복점들처럼 떠나거나 업종 변경을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 이곳은 양복 값이 가장 비쌌지만 손님이 가장 많았던 저력의 양복점답게 기성양복의 공격도, 경제불황의 고비도 가뿐히 넘으며 계속 잘 되고 있는 걸까요? 요즘은 한 달에 대략 몇 벌 정도 양복 주문이 들어오는지 에둘러 물었습니다.
“에이, 그런 건 묻지 마. 재미없어. 영업 비밀이여.”
좀 전까지 좋았던 시절을 자부심 가득 회상하던 얼굴에 슬몃 멋쩍은 웃음이 스쳤습니다. 재차 물었지만 손사래를 치며 대답 거부. 말할 수 없는, 아니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인 듯 했습니다. 인터뷰 내내 한명의 손님도 없었던 양복점, 저의 질문은 괜한 것이었고 실례였습니다.
[세월 속에서 크기가 작아진 가위, 원래는 같은 크기였다]
그러나 그곳엔 67년이나 어떻게 양복점이 유지되었는지, 어떻게 30년 경력의 일급 재단사가 탄생했는지를 보여주는 보물들이 있었습니다. 절단기로 잘라낸 것도 아닌데 일년이면 가위가 몇 개씩 닳아 없어졌다고 합니다. 대체 얼마나 많은 가위질을 하면 저 단단한 무쇠가 닳고 닳아 형상을 달리한 걸까요. 가위가 저렇게 될 때 어깨와 팔 근육은 손의 힘줄은 온전했을까요?
“오로지 초근목피를 벗어나기 위해 배 곯고 심부름해가면서 배운 기술이지. 이걸로 자식들 키우고 잘 먹고 살았어.”
한 물 갔다고, 전성기가 아니라고, 과거의 전유물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하지 마시기를. 날카로운 무쇠가 무뎌지고 닳아 없어지도록 그 긴 세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낸 그들의 화양연화가 그곳에 오롯이 남아있습니다.
☞ 이 글은 이츠대전TV 블로그 작가단의 글입니다. 대전시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츠대전TV '대전원도심이야기' 취재블로거 명창현 방송작가
원본 콘텐츠 : 대전시인터넷방송 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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