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의 유래 및 역사
- 금강의유래
금강의 대표적인 명칭은 금강(錦江)을 비롯, 웅진(熊津), 적등진(赤登津), 백마강(白馬江), 심천(深川)등이 있다.
금강은 용진과 함께 ‘사상’과 과 관련: ‘곰’이 신성시 되는데 이 곰은 ‘짐,검,금,가무…등’으로 전음되며, ‘검(儉), 금(錦), 금(今), 금(金), 금마(金馬)’, 개마(蓋馬) 등으로 적자 되기도 한다.
즉 ‘강’ 또는 ‘나루’는 ‘강→금강→금강(錦江)’으로 ‘나루→곰나루 →웅진(熊津)’으로 변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적등진(赤登津)은 옥천과 영동의 중간에 위치한 나루터로 영남지방과 호서지방을 잇는 길목이나 강이 있어 넓이 수십리를 가로질렀으니 적등이라 한다.
금강은 그 물줄기를 따라 구간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왔다. ‘택리지’에 보면 금강의 물근원이 되는 상류지역을 적등강(赤登江)이라 하고, 공주 부근을 웅진강(금강), 그 아래를 백마강, 강경강(江㬌江), 또는 그 아래를 진강(鎭江)으로 적고 있다.[이미지 출처] 우리가람이용도우미
- 금강의 역사
- 구석기시대
금강의 구석기 시대 유적은 공주 석장리 유적으로 대표된다. 석장리 유적은 지금부터 약 13~30만년 전의 전기 구석기로부터 중기, 후기 구석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층이 발견되고 있어 구석기시대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금강유역에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 삼국시대
삼한 소국의 하나로 출발한 백제가 처음에는 한강유역에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다가 문주왕때에 현재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를 하면서 본격적인 삼국시대로 들어선다.
- 고려시대
고려왕조의 성립 뒤 많은 호족들이 태조에게 가담하였지만 궁예에 충성하던 호족세력을 모두 자신에게 흡수할 수는 없었다. 왕건의 고려건국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은 금강유역의 청주, 공주지역의 호족 세력이었다.
고려후기에는 무신의 난의 영향으로 농민의 반란뿐만 아니라 노비, 천민의 봉기가 많았는데 이러한 저항세력 중 금강유역의 대적인 인물로는 공주 명학소에서 발생한 망이, 망소의 난(1176년)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는데 이를 막기 위하여 금강유역의 서쪽에 수많은 읍성을 수·개축하였다. 왜구의 약탈지는 처음에는 경상도 해안이었으나 점차 전라, 충청도로 북상하여 공민왕때에는 서울인 개경인근의 강화, 교통, 예성강까지도 출몰하였다.
- 조선시대
금강유역은 17세기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양법의 발달, 수전 이모작의 보급, 제언, 보 등 수리시설의 발달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진되었다. 임진왜란 직후 급격히 축소, 황폐화된 농경지를 확보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금강유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많은 지류는 보의 신축과 신전개발의 주요대상지역으로 넓은 면적을 관개할 수 있는 대보가 발달하였다.
금강유역은 국가전매의 소금과 주변유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미곡이 거래되는 중심지역이 되어 장시의 발달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앞서 나갔다. 대표적인 전주의 사탄, 강경의 강경포 등이 있다.
- 근대시대
일제에 의해 조선이 합병되면서 공주처럼 조선조에 강한 전통적 기반을 지녔던 지역들은 점차 축소되고 금강 중하류의 중심지는 새롭게 성장하는 대전 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던 기존의 문화적 기반들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1932년 대전으로의 도청 이전은 그 같은 작업의 하나였다. - 현대시대
광복후 금강유역은 별다른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1970년대초 ‘금강유역조사’를 계기로 이 지역 수자원개발을 위한 기본구상이 완성되었다. 즉 이 유역조사의 결과로 대청댐이 완공되어 대전, 청주지역의 용수공급에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서해안 해안지역의 논농사를 위한 삽교호, 금강하구언 등의 농업용수공급시설이 완성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금강상류에 용담댐을 건설하여 전주인근 지역의 생활용수공급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출처] 금강유역조사보고서(2006, 국토교통부- 한국수자원공사)
- 구석기시대
- 담당부서 : 생태하천과 (2022-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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