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대전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새 왕조는 새로운 국토를 결정하는데 크게 고심하였다. 조선의 새 국토는 대전 근교의 계룡산과 지금 서울의 무악 등이 물망에 올랐다. 이 가운데 계룡산이 가장 유력하였다. 태조는 새 국도로 물망에 올랐던 계룡산을 친히 살펴보기 위하여 태조 2년에 임금의 행차를 계룡산으로 행하였다. 2월 7일 유성에 도착한 왕은 온천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뒷날 태종이 임실현에 가서 무예를 닦을 때도 이곳에서 온천을 하였다. 왕실에서 온천을 이용한 것은 유성온천이 처음 있었던 일이다.
태조의 계룡산 정도는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계룡산은 풍수상의 신비성과 신도조성 등으로 인하여 이후 정감록을 비롯한 많은 전설을 남겨 신비의 영산으로 이 고장 사람들에 의하여 받들어졌다.
조선은 태종 13년(1413)에 전국의 군현제도를 새롭게 개편하였다. 이 때 대전지방은 고려 후기의 군현이 그대로 존속되어, 공주목의 임내(任內)였던 유성현과 덕진현은 폐현되어 공주목에 속하게 되었고 회덕현과 진잠현은 공주목의 영현이 되었다.
- 조선후기의 대전
- 1)지방행정
조선후기의 지방행정 구조나 행정담당의 계층이 전기에 비해 본질적인 변화를 보인 것은 없다. 조선후기에 지방제도의 개편이 있었으나, 대전지방의 군현은 전기와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외형적인 개편은 없었다 하더라도, 군현의 내적인 변화는 조선후기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사회 각 층에서 나타났다.
조선후기 사회의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였다. 조선사회는 임진왜란과 양호란을 겪은 이후 인구의 증가가 큰 폭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초기 대전지방의 인구가 3,000 여명으로 추산되었는데, 1720년대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나타난 인구를 종합해 보면, 공주목 지역 7,934명, 회덕현 9,994명, 진잠현 5,629명, 도합 23,557명으로 그 증가폭이 숫자상으로 8배에 이른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는 이 지역에서의 여러 측면에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 2)지방의 교육
조선은 유교주의 국가였다. 따라서 교육의 목적도 유교적 학식의 수양과 함께, 유교주의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유능한 관료의 양성에 있었다.
초등 교육은 서당이나 가정에서 받았다. 문자를 익히고 유교의 초보적인 지식을 쌓은 후, 서울에서는 4부 학당, 지방에서는 고을마다 설치되었던 향교에 들어가 중등 정도의 유교 교육을 받았다.
조선은 건국하자 한고을에 한학교(一邑一校)를 설치한다는 정책에 따라 대전지방에도 회덕현과 진잠현에 향교가 설립되었다.
- 3) 호서사림과 호서학파의 형성
조선중기에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고 성리학도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대전지방의 유학자로는 조선초기 단종복위를 꾀했던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이 이 지방(지금의 동구 가양동)에 거주하여 후대에 영향을 주고 있다. 사림파의 등장과 함께 기묘명현으로 이름났던 김정도 이 고장에 성리학의 뿌리를 심어준 분이다. 그러나 대체로 이 시기에 이 지방에서의 사림의 등장은 다소 늦었다.
16세기 후반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에 이황과 이이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란 양대 산맥이 형성되면서 호서지방은 조선후기 사림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호서사림이 형성되고 호서학파의 학문적 특색이 적립되었다.
이이의 기호학통은 그 적통이 이 고장과 이웃한 연산의 김장생(1548∼1631)에게 이어지면서 대전지방의 사림들이 그 문하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김장생은 연산에 살면서 송익필과 이이의 문하에서 예학(禮學)과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이이의 성리학을 재천명하고 이를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적통이 되었고 또한 예학을 대성함으로써 조선 유학의 종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400여 명의 문인을 배출하였는데 그 문하생의 대부분이 공주목과 그 영현에 거주하던 사림으로 이들이 호서사림을 형성하였다.
호서사림은 인조반정 이후 정계에 중용되어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김장생(연산), 박지계(신창), 강학년(회덕·연기) 등 호서사림의 중심적 인물이 산림(山林)으로 중용되면서 김집(연산), 조극선(덕산), 송시열(회덕), 송준길(회덕), 권시(공주), 윤순거·윤선거(노성), 이유태(금산·공주), 이상(전의), 송기택(회덕) 등 호서의 사림은 산림으로 부름을 받아 크게 활약하면서 정치적 세력을 키워 나갔다.
호서사림의 학문적 연원은 이이에서 이어지므로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이·성혼·송익필 등 기호의 학문적 바탕은 이이로 대표되어 김장생으로 이어졌지만, 이 학통은 호서에 자리를 옮기면서 그 특성이 심화되었다. 예학은 김장생으로 대표되었고, 성리학은 그의 적통을 잇는 송시열에게 이어지면서 정통성리학의 큰 맥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기호학파는 호서에 옮겨지면서 호서학파를 형성하여 학통을 이어갔다고 보아야 하겠다.
대전지방에는 송시열, 송준길 등을 비롯한 김장생의 문인이 크게 활약하기도 했지만 권시(공주), 윤휴(공주) 등 학문적 성격을 달리하는 다양한 학문의 전개를 보였다. 이같은 현상은 17세기 후반 대전지방이 조선 성리학의 학문적 핵심지로 주목되고 이후 이러한 학문 성향이 대전지방에 이어졌다.
- 4) 향촌의 자치조직과 동족마을
조선조의 중·후 향촌사회에서 사림의 지위를 강화하는데 기여한 것이 향약(鄕約)이었다. 중종때 조광조 일파가 처음 시행한 향약은 보수세력의 반발을 받아 조광조 일파의 몰락과 함께 폐지되었다. 그러나 명종·선조 때에는 사림이 다시 득세하는 추세에 맞춰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향약이 만들어져 군현이나 작은 마을을 단위로 하여 시행되었다. 향약의 시행과 병행하여 지방 양반의 명부인 향안(鄕案)을 만들고, 양반의 자치기구인 향회(鄕會)를 조직하여 공론(公論)을 모으고 향권을 장악하였다.
대전지방에서는 회덕향약과 회덕향안이 함께 전하여 오고 있다. 회덕향약이 성립된 것은 1672년(현종13)이지만, 회덕향안은 그 서문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그 이전에 구향안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회덕의 구향안은 16세기 이전의 이 지방의 재지사족 명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족에 의한 향촌사회의 지배권 확립은 16세기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 차례 큰 진통을 초래하였다. 임진왜란기의 사회적 혼란은 재지사족들로 하여금 그들이 임진왜란 이전에 확보했던 치향지인(治鄕之人)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원적인 방법을 취하였다. 첫째 현실을 인정하여 하층민들과 협력하는 방법, 둘째 사족들의 이념적 무기였던 성리학적 윤리강령을 앞세워 명분론을 더욱 강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회덕향안은 후자의 경우였다. 17세기 회덕의 송씨문중에서 송준길·송시열 등 정치·학 문·사상적으로 위대한 인물의 출현으로 은진송씨는 재지사족으로서의 지위가 명문거족으로 성장케 되었다. 그리하여 송씨는 호서지방의 연산김씨(광산), 니산(노성)윤씨(파평)와 함께 3대 족성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던 회덕에서는 남송북강이라 하여 강씨가 두번째 그 외 김씨, 이씨, 정씨, 박씨, 황씨, 한씨, 연씨, 변씨, 노씨, 양씨 등이 재지사족으로 회덕의 향권을 지배하였다.
조선후기 사족중심의 향촌지배체제가 이완되면서, 사족들은 과거의 향안·향규·향약 등을 통한 일향(一鄕)의 지배보다는 혈연적인 족계를 만들어 문중의 결속력을 다져 나갔다. 이 같은 현상은 16세기 이후에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있으나 대전지방에서 그 시기가 17세기 이후에나 나타나고 있다.
대전지방의 재지사족의 동족마을 형성은 어떠했을까? 동족마을의 형성은 문중활동이 보편화되는 시기와 연관시켜 이해될 수 있지만, 이는 17세기 중엽이후에 나타나는 가부장적인 친족관념의 폭 넓은 정착과 진전의 결과로 그 형성시기는 지역에 따라 시차를 두고 있다. 조선후기 문중의식이 일반화되고 이에 따라 여러 부수적인 친족체계상의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향촌사회 안에서는 문중의 조직이 활성화되어 족계의 조직이나 족보의 편찬, 동족마을의 형성발달, 문중서원·사우의 건립 등 다양한 문중 활동들이 나타난다. 대전지방에서는 은진송씨·충주박씨·안동권씨 등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으며, 이외의 재지사족들에게서도 그 자료가 있을 것으로 보이나 보고 된 것은 없다.
- 5) 대전지방의 사회
19세기의 조선사회는 척족의 세도정치로 인하여 왕권이 쇠약해졌고, 관료체제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세도정치기에는 설상가상 격으로 자연재해가 잇달아 일어나서 기근과 질병이 만연하고 인구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여전히 총액제(總額制)에 의하여 각종 세금을 거두어 들이고 있어서 삼정(三政 : 전정·군정·환곡)이 문란하고 농촌사회의 불만이 극에 달하였다.
농민들의 불만은 18세기 중엽부터 조직된 무장집단의 형태로도 나타났다. 19세기에 들어와 민중의 불만은 조직적인 형태로 확산되었다. 대전지방에서도 이같은 민란인 민중의 항쟁이 있었다
- 회덕민란
1862년(철종 13) 5월 12일에 일어났다. 이해 삼남지방의 민란에 영향을 받아 봉기한 농민군은 억울한 일을 호소한다는 명목으로 관아에 몰려가 현감 김낙균을 욕보였으며, 평소에 증오의 대상이 되어온 부정한 이서(吏胥)와 부호의 집을 불태웠다. 그뿐 아니라 청주목으로 침입하여 지탄을 받던 사람들의 집을 습격 불태웠다. 이 봉기에 연루되어 전 관찰사 조헌영은 유배되고, 현감 김낙균이 파직되었으며, 주동자 김진옥은 효수되고 그밖에 송만길·송일원도 처형되었다.
- 진잠민란
회덕민란과 같은 해 5월 18일에 발생하였는데 그 양상은 회덕민란과 거의 일치한 민중의 항쟁이었다.
- 회덕민란
- 1)지방행정
자료 : 최근묵(시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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