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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대전

후고구려 궁예를 물리친 왕건은 왕위에 올라 고려를 세웠다(918). 이어 경순왕으로부터 신라의 병합을 얻어 내는데 성공하였고(936). 다음 해에는 후백제의 신검을 공멸하는데 성공하여 완전히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보문산 마애여래좌상

고려는 건국과 함께 중앙관제를 정비하였다. 지방관제도 중앙관제가 확립되어 가던 성종 2년(983)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여 현종 9년(1018)에 일단락되었다. 고려의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나 대체로 명칭의 변화가 주였다. 995년(성종 14년)관제 개정에 따라 전국을 10도로 나누었는데 대전지방이 속한 도는 하남도(河南道)이다. 하남도는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에 해당되며 공주(公州)·운주(運州, 지금의 홍성)등 11개 주를 관할하였다. 1106년 (예종 1)에는 관내도·중원도와 합하여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칭하였고, 1171년(명종 1)에는 두 도로 나누었으나 1315년에 양광도라 하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비로소 충청도라 하여 지금의 충청남북도의 행정구역이 형성되었다. 대전지방은 공주목에 영속된 군현으로 회덕현, 진잠현, 유성현이 통일신라 때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이어왔고, 덕진현은 현종 9년에 폐현되어 공주목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의 대전지방은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한 자료가 적어 이 시대의 연구가 비어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특기할만한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 바로 공주 명학소민(公州 鳴鶴所民)의 봉기이다.

고려사회에서의 무신정권은 문벌귀족을 타파하여 신분제를 변동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지배층이 문신중심에서 무신으로 바뀐 이외의 피지배층의 관심대상인 수치체제나 지방관 수탈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특히 말단 행정구역 가운데 하나인 소(所)는 왕실이나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수공업·광업·수산업 부분의 공물(貢物)을 생산하였던 곳인데 국가에 의해 수탈당하는 강도가 가장 높은 편이었다. 이것이 명학소민이 봉기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들의 목적은 신분해방이었으나 국가가 이에 대하여 확실하게 보장하고 제반 대책을 수립해 주지 않을 때 그들이 바라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다음 단계로 정부타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명학소민의 봉기가 1년 반이나 계속되면서 충청도 전역을 확보하게 된 배경에는 공주 주변 농민들의 지지와 호응이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공주 명학소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공주 고적조에, 유성현 동쪽 10리되는 곳에 있다 한 것을 보면, 대략 지금의 탄방동·괴정동·갈마동 일대에 해당된다.

1176년(명종 6)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를 중심으로 명학소민은 가야산 근처의 손청 등과 연합하여 공주·예산·충주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에 놀란 정부는 회유책으로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켰으며,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조건으로 망이 등과 강화를 맺었다. 정부는 이들을 회유시킨 후, 주위의 반란 세력을 진압시켰고, 한편으로는 명학소민 재봉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 가두는 등 제반 조치를 강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게 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이제 그들은 신분해방도 기존 지배질서체제가 무너지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 없음을 자각하고 정부 타도를 외쳤다. 그들은 정부 지방관뿐만 아니라 지배층과 결탁하여 많은 토지와 노비, 그리고 소(所)를 장악하고 있던 사원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드러내어 가야사를 분탕하고 홍경원을 불태웠다. 한때는 청주목을 제외한 지금의 충청도 전 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지니기도 했지만 손청·이광 등 연합세력의 패배로 인한 고립, 정부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난은 진압되었다.

이 봉기는 고려 무신정권 이후에 일어난 민란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 중의 하나로서 무려 1년 반이나 계속 되었다. 이는 당시 지배층으로 하여금 피지배층을 위한 제반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절박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에 정부는 탐학한 지방관의 축출·토지 탈점의 방지·공역의 균등 등을 시행케 되었다. 이 정책은 기존 지배세력의 이권을 침범하지 않는 정도에서 한정되어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봉기를 계기로 중앙에 특산물을 공납하던 소는 재검토를 요하게 되어 점차 소멸되는 하나의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망이 등의 피지배층에서 봉기의 지도자가 나온 점, 정부 타도를 표방한 점 등은 백성들의 힘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어, 이후 만적의 난·경주민의 봉기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고려는 역사적으로 외침이 가장 많은 나라였다. 그러나 대전지방은 한반도의 중남부에 위치하여 큰 난을 겪지 않았다. 고려후기 왜구가 창성하여 금산지방과 개태사를 노략질 한 것과 유성에 침입한 것을 보면 금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침입했던 왜구에 의해 피해를 본 것으로 보여진다.

대전지방의 고려시대 문화 유적은 큰 내용을 찾아 볼 수 없지만, 보문산의 보문사지와 불상, 식장산의 고산사 등에서 그 모습을 겨우 찾을 수 있다.

자료 : 최근묵(시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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