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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뜨거웠던 한밭벌의 독립운동을 엿보다

2023.03
  • 등록일 : 2023-02-24
  • 조회수 : 644

무정신(無精神)의 역사가 무정신의 민족을 낳으며 무정신의 민족이 무정신의 국가를 만드니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

-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신채호 선생의 글 ‘독사신론’ 중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3·1절을 맞아 단재 신채호 선생을 전후해 민족의 독립과 올바른 역사를 위해 일평생을 바쳐온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문충사에 있는 송병선·송병순 형제 동상>

망국의 울분에 자결한 송병선·송병순 형제

한말의 우국지사 송병선(1836~1905)과 송병순(1839~ 1912) 형제는 우암 송시열의 후손으로, 형제 모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유학자였던 송병선은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을사5적의 처형, 을사늑약의 파기 및 의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겨놓고 자결했다. 동생 송병순 역시 1910년 한일병탄이 되자 세 번이나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랬다. 그해 12월에 찾아온 일본 헌병을 크게 꾸짖어 돌려보내고 끝내 음독 순절했다. 형제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충사가 동구 용운동에 있다.


<중구 어남동에 있는 신채호 선생 생가지>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 민족사관 신채호 선생

신채호 선생(1880~1936)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활약하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던 독립운동가로,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선생은 1880년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 현재의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신성우로부터 한학을 익혔고, 1897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남규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910년 4월 평안북도 오산학교를 거쳐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이갑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1912년 연해주의 항일단체인 권업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권업신문>에서 주필로 활동하다가, 1913년 중국 상해에 예관 신규식 선생과 함께 박달학원을 설립, 민족교육에도 힘썼다. 

1914년 <권업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남북 만주와 백두산 일대 부여, 고구려, 발해 유적지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했고 1915년 상해로 가서 신한청년회 조직에 참가했다.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 선생은 이런 견해가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남삼한 이전 북삼한 시대가 있었다는 전후삼한(前後三韓)시대에 대한 적극적 연구와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선생이 우리나라 단군조선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까지 상고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 <조선상고사>에서 선생은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가 삼국 이전이고 활동무대도 북으로 북만주, 서남쪽으로 요서·발해만 유역·직예성·산동·산서·회하·양자강 유역까지 미쳤다고 주장하는 등 종래의 한국사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역사관을 수립했다.

<고 이유립 선생>

<중구 은행동 목척5길에는 한암당 선생이 살았던 가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역사광복의 초석을 닦은 이유립 선생

단재의 출생지가 대전인 것을 처음 밝혀낸 이는 한암당 이유립 선생(1907~1986)으로 그는 운초 계연수와 단재 신채호를 사표로 삼았다. 월남 후 선생의 첫 제자였던 양종현 씨는 한암당 선생이 운초(계연수), 벽산(이덕수), 단재(신채호)의 사관을 기초로 민족 사관을 정립했다고 증언했다.(양종현 <백년의 여정>) 이유립 선생은 1907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독립운동가 단해 이관집 선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관집의 동생 이태집, 이태집의 아들 이유항(李裕沆)도 독립운동을 했는데, 그중 이유항 선생은 독립유공자다. 청소년 시절부터 평북 삭주의 천마산대(의민사 소속의 무장독립군)에서 묵거 전봉천과 함께 통신원으로 활동했는데, 훗날 천마산대 출신 독립유공자 오봉록 지사(1902∼1981)가 천마산대 대원의 이름과 활동을 실은 <삭주군지>에 한암당 선생의 독립운동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이유립 선생은 10대 때 독립운동을 도우며, 당시 단학회 2대 회장이자 <환단고기> 초간본(1911)을 편찬한 운초 계연수(1864~1920) 선생에게서 역사교육을 받았다. 20대 초반 신간회 삭주지부 결성대회에 참여하다 왜경에 의해 해산당하기도 했고, 1930년 삼육사(三育社)를 조직해 잡지 <삼육三育>을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듬해 7월호에 광개토열제의 일본열도 정벌을 담은 ‘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 기사를 실었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이유립 선생의 아내인 고 신매녀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1945년 광복 후 북한에서의 활동이 여의치않아 1948년 월남하는 도중 해주내무서에 6개월간 감금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살아서 내려왔다.

1953년 6·25전쟁이 끝난 후 선생과 가족들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대전 목척시장에 있는 적산가옥에서 살았는데, 2층 선생의 서재 이름이 한암당(寒闇堂)이었다. 여기에서 1963년 5월 단학회를 계승, 단단학회(檀檀學會)의 명칭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기관지 <커발한>을 발행했으며, 역사 연구와 강연 등의 활동을 하며 후학을 양성했다.선생은 1976년 <커발한 문화사상사Ⅰ,Ⅱ>를 발간하고 그해 10월 안호상, 박창암,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하여 국내 교과서 수정을 요구하는 등 중국과 일본에게 빼앗긴 역사를 되찾기 위한 적극적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79년 재판본 <환단고기>를 단단학회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했다. 1987년 제자들은 한암당 선생이 <월간 자유>지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 5권으로 된 <대배달민족사>를 출판했다.

대전에 거주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40년간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이유립 선생의 딸 이순직 여사(77)는 “수년 동안 야간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시면서 그 학생들과 대영절(음 3월 16일)에는 마니산 참성단에서, 개천절에는 태백산 제천단에서 천제를 지내시고 제자 양종현 등을 매일 만나시면서 지방대학을 두루 다니시고 역사 강의도 하셨다. 아버지는 독립유공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오직 나라를 생각하고 올바른 국사를 찾는데 온 힘을 기울였던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국립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의 묘>

홍범도 장군 등 대전에 들어 있는 독립유공자들

국립대전현충원에는 전몰·전상·무공수훈 유공자, 순직·공상 유공자 등과 함께 독립유공자들이 잠들어 있다. 

지난 2021년 카자흐스탄에서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은 만주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둔 독립운동가로서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 최대의 승전을 기록했다. 류자명 지사는 주로 일제의 수괴급을 암살하거나 일본의 공공기관을 파괴하는 작전의 배후인물로 의열단장 김원봉의 비밀참모 역할을 했던 그의 주된 활동목표는 국내외의 고위직 일본인과 친일파의 제거작업에 있었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로, 독립운동하는 이들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돌봐주었던 곽낙원 여사 역시 류자명 지사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조선영화였던 ‘아리랑’으로 더 유명한 나운규 지사는 3·1운동 이후 터널이나 전신주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독립군 단체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해 활동하다,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일제강점기 해녀로서 제주지역 최대의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김옥련·부춘화 유공자도 이곳에 영면해 있다. 김옥련·부춘화 지사는 1932년 제주도 구좌면에서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일본 관리와의 담판을 벌여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1931년 1월에는 제주도 민족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