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의 일부
다시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언 땅을 비집고 올라오던 새싹 을 맞으러 들판에 나간 날이 엊그제인데 벌써 1년을 보내 고 다른 해를 맞고 있다. 많은 사람이 지난 시간을 아쉬워 하며 다가올 시간에 얹을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사실 이런 일은 언제나 하는 일이다. 점점 과거가 되는 내 시간들은 항상 아쉬움으로 쌓이고 곧 현재가 될 미래는 희 망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유독 연말이 다가오면 시간에 관해 다시 생각한다. 우리가 생활하며 느끼는 시간에 마디 라도 있는 것 같다. 하루가 끝나는 시간에, 한 달을 마무리 하면서, 한 해를 보내는 순간 등 시간에 표시가 있어 뭔가 가 바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에 정해진 표식이나 느 낄 수 있는 마디는 없다. 그저 인간이 자연의 순환에 눈금 을 새겨놓고 그것에 따라 무언가 흐른다고 생각하기로 약속한 것에 불과하다. 과학 일반에서는 시간을 ‘사건들 사이의 거리’라고 정 의하며 주로 측정의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다. 반면 물 리학은 시간 자체를 들여다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데, 이런 물리학 안에도 세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먼저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바라보는 시 간이다. 상대성이론에서는 시간을 ‘네 번째 차원’으로 정의한다. 그러니까 길이, 넓이, 부피, 세 개의 차원으 로 이루어진 공간에 또 하나 더해진 차원이 시간이다. 그 결과 공간은 시간과 합쳐져 시공간으로 변한다.
아인슈타인이 발명한 시공간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시 간이 아니라 빛의 속도이다. 시공간에서 당신이 정지해 있다면 당신의 시간은 빛의 속도로 미래를 향한다. 당 신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러니까 공간을 사용 하기 시작하면 그만큼 시간의 분량이 줄어든다. 시간 이 느려지는 것이다. 달리 말해 빛의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공간이 줄어들거나 시간이 느리게 간 다. 기준이 되는 면적이 변하지 않기 위해 시간과 공간 이 가로와 세로가 되어 서로 길이를 주고받는 형세이 다. 그래서 누군가 빛의 속도로 달릴 수 있다면 정지한 시간을 보게 된다. 두 번째는 아주 작은 세계의 구조를 살피는 양자역학에 서의 시간이다. 여기서 시간의 역할은 이상하리만치 미 미하다. 큰 정체성을 가지고 대단한 역할을 한다기보다 는 방정식에 그저 ‘t’라는 변수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시간은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한 다. 아주 작은 세계에서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긴밀하 게 얽혀 있지만 시간은 순차적이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결과에 의해 과거가 결정되기도 하고 현재의 시점에 결 정되지 않은 과거를 보게 된다. 정신없는 시간이다.
열역학에서 등장하는 시간은 방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 가 현실에서 느끼는, 미래에서 현재를 지나 과거로 흘 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설명하고 있다. 그 근거는 ‘무질 서도’라고 불리는 엔트로피라는 양이다. 엄마가 깨끗하 게 정돈해놓은 방은 아이가 돌아오면서 바로 어질러진 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이다. 우리 우주는 전체적 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유리잔 은 깨지고 뜨겁던 사랑은 식어간다. 이것이 시간의 방 향이다. 사실 우리는 아직 시간에 대해 모르고 있다. 많은 최신 이론들이 시간에 대해 여러 측면을 말하고 있지만 아직 어떤 합의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과학에서 다 루고 있는 시간의 현실이다. 물리학자 휠러는 “시간은 자연이 모든 사물의 변화를 기록하기 위해 채택한 방법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시 간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 거이다. 그래서 시간을 돌아보는 일은 변화하는 스스로 를 돌아보는 일이다. 지금의 나와 과거에 존재했던 나, 그리고 다가올 나를 예측해보는 일이다. 다시 경외가 가득한 눈으로 우주의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바다의 생물들이 물결과 파도에 몸을 맡기고 생명을 즐 기듯 시간은 우리가 누리고 즐겨야 하는 그 무엇이라는 사실 하나는 확실하다.
글 김병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