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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원도심의 옛기억]원도심의 지워진 이름, 목척리를 소환하다

2023.02
  • 등록일 : 2023-01-26
  • 조회수 : 1469

<1950년대 목척교. 저 멀리 도로 끝에 옛 충남도청사가 보인다. 목척교 건너 오른쪽이 은행1구역이다.>


위로는 옛 동양백화점(현 NC백화점), 아래로는 대전천을 끼고 있는 은행 1구역. 대로변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좁은 골목길에 오래된 가옥들이 다닥다닥 줄지어 섰고 요즘의 젊은 사람들은 잘 들어보지도 못했을 목척시장이 있다.

지난해 2월, 은행1구역 정비계획이 대전시 도시계획위원회 심의를 통과했다. 우리는 몇 년 뒤면 목척시장 주변의 작은 상가와 집들, 좁은 골목들 대신 대단위 아파트단지로 바뀐 새로운 은행동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대전시는 도시정비사업 등으로 인해 사라지는 지역의 역사·문화적 유산들을 연구·조사해 기록하는 지역리서치 사업 일환으로 지난해 5월부터 11월까지 은행1구역에 대한 문화재 조사를 진행했고 지난 1월 27일까지 한 달간 대전근현대사전시관에서 결과보고전을 열었다. 그 결과물을 통해 은행1구역에 대한 지난 시간들을 소환해본다.


대전면의 유일한 한국인 마을 ‘춘일이정목’

은행1구역은 중구 은행동(銀杏洞)의 북서쪽 구역으로, 한때 ‘은행동 2구’로 불렸으며, 그전에는 ‘춘일이정목(春日二町目)’이라 불렸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 이곳의 이름은 ‘목척리(木尺里)’였다. 

은행1구역은 이처럼 짧지 않은 역사와 함께 은행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중앙로 건너편의 은행동처럼 ‘대전의 명동’이라 불리지도 않으며, 문화예술의 거리 ‘대흥동’이나 ‘선화단길’이라 불리는 ‘선화동’ 같은 주변 동과는 사뭇 다른 경관과 분위기를 갖고 있다. 

한때 목척시장을 중심으로 번화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했고 여전히 원도심의 한 중심에 있으나 지금은 누구도 쉽게 발을 들이지 않는 사라진 마을이 되었다.

목척리(木尺理)라는 지명이 보이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세기 조선 영조 때 각 도(道)의 읍지(邑誌)를 모아 개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이다. 여기에는 ‘목척리는 (공주의) 관문에서 동쪽으로 80리(31.4㎞) 떨어져 있으며, 61호의 집과 181명의 인구가 있다’라는 짧은 설명이 실려 있다. 


<1900년대 인구, 주요도로 등이 기재된 지지조서용지>


하지만 목척리가 정확히 어딘지를 보여주는 기록은 일제의 한국병합 후 제작된 <지지조서(地誌調書)>이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지방행정구역 개편 후, 각 군의 면사무소는 해당 면의 지도와 함께 동리(洞里)와 인구, 주요 도로 등이 기재된 일종의 대장(조서)을 작성했는데, 당시 대전면의 대장에는 ‘춘일2정목은 예전 ‘목척리’로 349호의 집과 1,374명의 인구가 있다’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1914년의 대전면은 대전역 앞의 시가지와 그 주변의 일본인 정착지를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지정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대전천을 기준으로 동쪽은 일본인의 거주지였고 한국인들은 주로 대전천 건너 서쪽에 살았는데, 목척리는 대전면에 포함된 거의 유일한 한국인 마을이었다. 그로 인해 대전천변 서쪽에 면한 목척리의 일부, 지금의 은행1구역은 ‘춘일이정목(春日二町目)’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80년대에 촬영된 은행1구역 전경>


1960년대 은행동과 함께 원도심 중심 상권 우뚝

1930년대 초반까지 춘일이정목, 즉 지금의 은행1구역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1931년 6월에 촬영된 대전 최초의 항공사진에는 당시 은행1구역의 전경과 함께 그 경계 밖, 즉 대전면 외 지역이 여전히 개발이 안 된 채 한촌(寒村)으로 남아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만큼 대전면과 대전면 밖은 차이가 컸다.

1945년 광복을 맞고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졌지만 지금의 은행1구역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피해는 오히려 북쪽 은행동 즉 지금의 으능정이 쪽이 훨씬 컸다. 미국 라이프(LIFE)지의 사진기자 조 슈어셀(Joe Scherschel)이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면, 은행1구역은 상당 부분 전화를 피한 반면, 건너편 은행동 구역은 옛 대전부청사(구 삼성화재) 건물을 제외하고는 건물 한 채, 나무 한 그루 남기지 않은 채 완전히 파괴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으로 도시는 거의 그 기능을 상실했지만,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대전, 정확히 지금의 대전 원도심의 인구는 크게 늘었다. 또한 전쟁으로 물자는 부족했지만 역설적으로 그로 인해 시장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목척시장이 활성화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더구나 일제시대부터 목척시장의 주요 상품은 미곡과 신탄(薪炭) 즉 땔감이었다. 지금의 목척시장 인근 은석주차장 자리에 큰 제재소가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제재소에서 나오는 자투리 나무들이 곧바로 시장에서 땔감으로 팔렸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향토사학자 김영한 선생(1920~2018)에 따르면 일제시대 춘일정에는 ‘덕화루(德和樓)’라는 유명한 중국요릿집이 있었는데, 이 덕화루는 1950년대까지 지금의 은행1구역에서 영업을 계속했다. 이런 몇 가지 사실과 정황들로 볼 때, 은행1구역은 한국전쟁 때 폭격의 피해 없이 건물과 자산들이 어느 정도 보존되었고, 1960년대 재건시대를 거치면서 전후 복구사업이 시작된 맞은편 은행동 쪽과 함께 대전 원도심의 중심 상권을 형성했다.


둔산 개발과 함께 쇠락… 정비계획으로 전환 준비 중

은행1구역은 1980년대 말까지 원도심의 중심 상권을 이루며 호황을 누렸다. 목척시장 주변으로 다양한 상가와 사무실, 모텔과 여인숙 등 숙박시설들이 입주해 있었고, 유흥과 함께 성매매까지 이루어지던 속칭 ‘방석집’까지 성업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서구 둔산지구가 개발되고, 시청과 법원을 비롯해 주요 관공서들이 떠나면서 은행1구역은 원도심과 함께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 IMF 사태를 맞으면서 깊은 불황의 늪에 빠졌다.

지난해 승인된 정비계획 안의 총개발 면적은 83,147㎡로 약 3,000세대가 입주하는 공동주택 건축을 골자로 한다. 목척시장으로부터 시작해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약 100년간 이어온 대전의 핵심 상업지구에서 다시 주거지역으로 회귀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은행1구역의 역사는 현재 가장 극적인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