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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소장유물
유적명 주산동고분군(注山洞古墳群)
위치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시대 신라시대
소유자
지정종별번호
출처
작성일 2005-02-28 00:00:00.0
조회 10617
첨부
상세정보

능성으로부터 같은 남북종주산맥의 산능선으로 난 소로를 따라 북상하면, 가양공원 뒷산을 거쳐 경부고속도로 질티터널위로 질현성(迭峴城) 방향 소로가 있고, 소로를 타고 질현성에 올라보면 동쪽 300m 정도 떨어진 산 정상이 보인다. 바로 이 산이 고봉산(古鳳山, 해발 280m)인데, 고봉산 동남쪽 경사면에 주산동고분군이 위치한다.
주산동마을에서 보면 서남쪽으로 약 500m의 거리에 있으며, 해발 150m전후의 산복에 자생하는 소나무 숲에 있다. 산록하에 있는 평지와의 상대높이는 50∼60m 정도 된다. 특히 그 부근에 주산동마을로부터 완만하게 올라가는 대전∼옥천간 고대로에 <질티>고개가 있었던 점을 볼 때, 고대 이후로 전략적 요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분 분포지역의 동쪽에 인접해 작은 계곡이 있으며, 계곡을 따라 북북서∼남남동 방향으로 완만하게 경사된 지형을 이용해 고분군을 축조했다. 고분군은 대략 길이 50m X 너비 25m 가량의 구간내에서 12기가 1군을 이루었고, 이 구간에서 남쪽으로 20m 떨어진 지점에 다른 고분 1기가 조사된 바 있다. 주산동고분군은 13기의 작은돌방무덤[小形石室墳]이 한 지역에 밀집된 군집분인데, 이들 중에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1기이고, 나머지 12기는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이었다. 그런데 구덩식돌방무덤들 중에는 개석을 덮은 후 한쪽 단벽을 매장통로 사용한 소위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이 6기나 존재했다. 구체적으로 매장통로의 위치는 돌방의 장축이 동서방향으로 놓인 경우에는 동벽이 사용되고 남북방향인 경우에는 남벽이 사용되었다.
돌방내부의 시설은 굴식돌방에서 관대(棺臺), 한편 구덩식돌방은 돌방바닥의 일부에 장방형 석괴(石塊)의 시상(屍床)이 설치되었다. 그 면적은 시체 한구나 관을 안치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다. 이 시상의 위치는 입구로 사용된 단벽에서 보아 향좌편에 편재하여 있다. 그러나 시상을 마련하지 않은 고분들은 대개가 바닥면 전체에 돌을 깔았다.
발견유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토기류이며, 그 총 숫자는 45개체분에 해당된다. 출토토기의 주체는 뚜껑식[有蓋式] 소형굽다리접시[高杯], 긴목단지[長頸壺], 그리고 병이다. 굽다리접시는 굽다리의 높이가 2㎝내외로서 매우 낮은 것이 특색이며, 굽다리부에 간단한 굽구멍[透孔]을 배치한 형식도 포함된다. 뚜껑은 꼭지의 형태가 특징적이면서, 그것이 마치 그릇의 밑굽처럼 생겼다. 이러한 소형굽다리접시가운데 굽다리의 퇴화가 뚜껑접시[蓋杯]와 다름없는 기형도 있다.
소형굽다리접시 이외에 주목되는 것은 3호분과 5호분에서 출토된 굽다리긴목단지[臺付長頸壺]인데, 이들 긴목단지는 6세기 전반 경의 경주 호우총(壺于塚)에서도 출토되었다. 하지만 그 전통은 훨씬 후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2호분에서 출토된 무뚜껑식[無蓋式]굽다리접시이다. 이것은 통일신라시대의 고분으로 알려져 왔던 경주 충효리1호분에서 출토된 굽다리접시와 동일한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살펴볼 때, 주산동고분군은 신라고분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돌방묘제의 경우도 돌방구조나 매장시설로 미루어 경주에서 신라고분의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다. 결국 출토토기의 편년적 대비를 통해 볼 때, 신라 진흥왕이 급격히 영토를 확장해 가던 6세기 중엽 이후에 축조된 유적이 아닐까 한다.


<표> 주산동고분군 특징과 출토유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