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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명 황천성(黃天性)
생몰년대 1910∼1974
출생지
출처
조회 7219 작성일 2003-09-22 00:00:00.0
첨부
상세정보 교육자, 황천성은 1910년 10월 25일 충청남도 연기군(燕岐郡) 전의면(全義面) 읍내리(邑內里)에서 창원황씨 병사공파 11세손인 황란식(黃蘭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독학으로 판임관(判任官) 시험에 합격하여 연기군청 주사로 근무한 관계로 조치원읍(鳥致院邑) 서창동(西倉洞)에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6세 때부터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재주가 뛰어나고 끈기가 있어 천자문, 동몽선습을 배우고 통감 둘째권까지 배웠다. 한문을 배우면서 그에게는 소인이 아니고 군자로서의 도리를 지켜야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조치원 공립 심상소학교(조치원 대동초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자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시자 가세가 빈곤해졌다. 그런 가운데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학업을 계속하였다. 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 학교에 부설된 고등과 2년을 수료하였다.

두뇌가 명석하고 성실한 인품에 감동했던 선생님의 추천으로 1928년 4월 공주에 있는 충청남도 공립사법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자로서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학업에 열중하였다.

1931년 3월 충청남도 공립사범학교 특과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그는 같은 해 5월 20일 서산 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임명되어 교직 생활의 첫 발을 내밀게 되었다.

사범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교육계에 몸을 던진 만 21세의 청년 교사인 그는 일제 치하에서 고통을 겪어가며 빈곤 속에 헤매는 민족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고, 교육을 통해서 유능한 인재를 길러 조국의 광복을 도모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아동 교육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기가 담임한 아동들을 극진히 사랑하였다. 대개의 경우 하루 일과가 시작되면 출석부를 들고 들어가 이름을 불러 출결을 확인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는 출석 부르는 방법이 달랐다고 한다.

그는 앞자리부터 아동들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얼굴빛이 언짢은 아이를 발견하고 그 이유를 물어 위로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아침을 굶고 온 어린이는 없는가? 수업료 때문에 울고 온 아이는 없는가 살폈던 것이다. 그리고 결석한 아이가 있으면 그 이웃에 사는 어린이에게 물어 그 사유를 확인했다.

아동 교육에 있어서 사무적으로 처리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정과 정이 맺어지는 교육적인 처리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담임한 어린이들이 그를 몹시 따랐다고 한다.

1933년 11월 고향인 전의 공립 보통학교에 전임된 그는 고향에서 8년 동안 훈도로 근무하면서 고향에 사는 어린이 교육에 정열을 불태웠다. 고학년인 5·6학년을 주로 담임하면서 그들의 진로지도와, 한국사람으로서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은연중에 깨우치도록 노력하였다. 조선어(일본어를 국어라하였고, 우리말을 조선어라 했다) 시간이 되면 우리 겨레의 슬기로움과 선비 정신을 일깨우는데 힘썼다고 한다. 전의 보통학교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낸 그는 1941년 9월 천안영정 공립 초등학교로 전임되었고, 1944년 9월에 천안동 공립 초등학교로 옮겨, 이 학교에서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조국 광복을 맞은 그는 1945년 10월 천안 영정공립초등학교로 잠시 옮겼다가 1947년 4월 16일자로 연기군 전의면 소재 소정초등학교 교장이 되어 학교경영 책임자로서 활동하게되었다.

해방 직후 미 군정하에 있던 우리나라는 참으로 어수선하였다. 좌익과 우익진영의 치열한 대결, 물가고와 경제의 혼란 속에서 그는 학교를 경영하여 올바른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어려서 배운 한학(漢學)의 영향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정신을 강조하고 공산주의의 허위 선전에 넘어가지 않도록 교직원들을 설득하였다. 당시 교직원 중에는 학교내에서 적기가를 가르치고 좌익 계열에 포섭되어 사사건건 학교경영에 반대하는 교사들도 있었다. 그가 근무하던 소정초등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교장으로서 그들을 타이르고 반공의 기치아래, 아동 교육에 전념할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청렴 결백하고 성실하며 솔선수범하는 그의 인품에 모든 교직원들이 고를 따랐고 인화 단결하여, 그 어수선한 당시의 교육여건 속에서도 민주주의 민족교육의 기치아래 아동 교육의 내실을 기하는 모범적인 학교를 경영하였다고 한다.

1948년 4월 전의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되었고 1951년 2월 연동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학교경영에 힘쓰던 그는 1953년 6월 30일 신탄진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부임한지 얼마 안되는 그 해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북진통일를 바라던 우리 민족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학교 경영의 중점을 반공 도의 교육에 두고 추진하였다.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는 길은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어 국력을 배양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나라사랑의 교육을 부르짖었고, 노작교육과 과학 기술 교육에 힘썼다.

학교 주변의 실습지를 이용하여 스승과 제자가 일체가 되어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생산하는 기쁨을 맛보게 했다.
교장인 그로 손수 삽과 괭이를 들고 땀을 흘리며 일하였다. 또 과학 실험 기구를 정비하여 책과 말로만 하는 자연과 학습을 지양하고 실험을 통해서 과학의 원리를 발견하는 자연과 학습을 하도록 지도하였다.

그는 학교 경영의 실을 거두려면 인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교장의 지시나 명령만으로 학교가 훌륭하게 경영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먼저 학교의 교감, 교무, 연구 등 간부 직원들과 충분히 협의를 하고 계획을 세운후에 직원회를 열어 충분히 토의한 다음에 시행에 옮기는 과정을 꼭 밟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는 공을 세우기 위해 서두르지 않았다. 그에게 금전이나 물욕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명예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오직 맡은 바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일 뿐이었다.

그는 길에 굴러다니는 돌도 어딘가 찾아서 쓰면 쓸모있게 쓰여진다고 말하고, 불평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직원도 그의 장점을 찾아서 그를 인정하고 학교 경영에 참여시키므로써, 사기를 높여 주었다고 한다.

그의 3년 동안의 신탄진 초등학교 경영실적은 서서히 나타나 대덕군내의 우수한 모범학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56년 3월, 그는 대전문창초등학교 교장으로 영전하게 되었다. 대전문창초등학교에 부임한 그는 교육과정 운영의 정상화를 경영의 중점으로 삼고, 학습지도의 개선과 특별활동 운영의 내실을 기하는데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는 현직 연수를 강화하고 과제를 중심으로 아동 스스로 과제를 해결하고 발견하는 아동중심의 토의식 학습을 권장하였으며, 어린이회 운영을 활성화하여 아동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면학생활을 실천하도록 하였고, 클럽활동을 통하여 어린이들의 개성을 신장시키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교 경영 실적으로 정부는 1960년 1월 1일 녹조 소성 훈장(제319호)를 수여한 바 있다.

1959년 3월 대전동광초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고 1960년 12월 홍성초등학교 교장을 거처 1964년 4월 대전성남초등학교 교장으로 다시 대전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대전성남초등학교에 부임한 그는 5·16혁명후 일어난 조국 근대화를 위한 경제개발계획에 호응하여 민족주체성 확립을 위한 정신 교육과, 과학 및 실과 교육을 중시하는 생산 교육에 역점을 두고 학교를 경영하였다.

아동들에게 우리나라 위인전기를 읽도록 권장하였고, 근검 절약하여 저축에 힘쓰는 한편 국산품을 애용하여 나라 사랑의 정신을 행동으로 실천하도록 강조하였다.

학교의 과학 환경을 정비하여 실험실습을 강화하도록 하였고, 실습 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는 대전선화초등학교, 가수원초등학교 교장을 거쳐 1974년 12월 24일 동명초등학교 교장 재직중에 정년을 1년 3개월 앞두고 세상을 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그의 유해는 아동과 학부모, 많은 교육자들의 애도속에 연기군 금남면(錦南面) 감성리 뒷산에 안장되었다.

《자료 : 유족 제보》
《朴喆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