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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명 심재갑(沈載甲)
생몰년대 1904∼1989
출생지 충남 공주군 의당면 율정리
출처
조회 1168 작성일 2003-10-17 00:00:00.0
첨부
상세정보 교육자. 호는 영암(暎岩)이며, 청송(靑松)인이다. 조선조 누대에 걸쳐 출장입사한 명문경세의 후손으로1904년 6월 26일에 충청남도 공주군 의당면 율정리에서 부친 봉섭(鳳燮)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유년부터 남달리 총명과 재기가 뛰어났으며 유가의 법도를 꾸준히 닦아 인자한 자품을 보이더니 장성하면서 높은 덕망을 쌓으매 향인의 추앙을 한 몸에 받았다. 공은 학문을 연마하여 인간의 도리를 터득하고 실지로 만천하의 일을 담당할 수 있는 경륜을 쌓았으며, 이를 능히 수행할 수 있는 경세관을 확립하였다. 그러기에 약하지도 않았으며 황태하지도 않았다. 공은 지성(志誠) 화이부동(和而不同)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가훈을 손수 설정하여 진신(縉紳)의 가통을 면면히 이어갈 것을 늘 강조하였으며 효제충신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대도를 거듭 깨우쳐 주었다. 공은 비천한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면서도 명문세족의 긍지를 잃지 않았으며 가난과 싸워가면서도 2세 교육에 온갖 정열을 쏟았다. 그 결과 슬하에 자랑스런 자녀와 많은 영손을 두었으니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은 학식이 높으면서도 벼슬을 탐내지 않고 청백과 의리와 지절(志節)을 생명처럼 지켜왔으며 구차히 부귀영달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공은 당시 국운(國運)이 쇠잔하여 일제강점의 치욕을 몸소 겪으면서, 이로부터 국권을 회복하는 지름길은 우리 민족을 문맹과 무지에서 해방시켜야 된다는 일관된 지도일념으로 오로지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교육에 가장 기초가 되는 초등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은 바도 있었지만 부친의 유훈에 따라 사도의 길을 택하였다. 1930년 3월 공주 공립 사범학교를 졸업하면서 그해 4월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일제하 15년5개월 동안 민족주의자로 지목을 받아 온갖 고통과 불이익을 당하였다. 청양군 정산 보통학교를 시발로 연기군 금남 보통학교, 청양군 운곡 보통학교, 공주군 반포성덕 보통학교 등 주로 농촌학교에서 가난한 농민의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제자의 고통은 선생의 고통이며 제자의 기쁨은 곧 선생의 기쁨이었다. 제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마치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와도 같이 항상 자기 자녀처럼 사랑하고 아끼며 보살펴 주었다. 공은 일제치하에서 마음 속 깊이 품은 치욕의 한을 풀기 위해 조국광복의 기수가 될 제자들에게 사랑과 정열로 민족혼을 불어넣어 주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참다운 인간을 양성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는 한국인 교육자가 지녀야할 투철한 소명의식이며 민족적 양심의 발현이기도 했다. 공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공주군 호계 초등학교 교장으로 승진되어 부임하였다. 당시 낙후된 농촌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선생은 그 곳에 전기를 끌어 어둡던 학교와 동네를 대낮 같이 밝게 하였다. 학생들의 향학열은 더욱 불타 올랐다. 한편 학습방법도 개선하였다. 구태의연한 교사중심의 주입식 교육을 과감히 탈피하였다. 새 교육이론에 입각한 분단학습, 토의학습, 단원학습에 대한 현직연수를 철저히하여 이를 적용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호계 초등학교에서 2년의 재임기간을 마치고 강경 중앙초등학교로 영전하였다. 그 때 동족상잔의 비극을 접하였다. 선생은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서천, 청양 등지로 피난시키면서 학교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잃을 뻔 했던 고난의 나날을 보냈다. 공은 다음 해 논산 부창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겨 학교건축과 새로운 교육방법 적용에 정열을 쏟았으며 1954년 5월에 대전 원동초등학교로 영전하여 만 3년 그리고 대전 신흥초등학교(정도상 교장 후임)에서 3년 반을 근무하면서 전후의 학교교육 부흥을 위해 노심초사하였다. 당시는 6·25동란으로 대전 역사를 비롯하여 시내 중심가가 여지없이 파괴되었고 온전한 교육시설은 한 곳도 없었다. 학생들은 교실도 여타 시설도 없는 노천학교,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계속 하였으며, 교실 하나를 둘로 나누어 책상 걸상도 없이 2부제, 3부제 수업을 실시하였다. 전후의 학교재정은 극히 빈약하여 시설에 투자할 자원이 없었다. 공은 이런 악조건하에서도 교육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려는 강한 집념으로 불철주야 교육 독지가를 찾아가 교육여건의 현실과 교육의 중요성을 호소하였다. 선생의 높은 교육열에 크게 감동한 많은 독지가들이 선생의 뜻에 적극 호응하였다. 불탄 교실을 재건하고 부족한 교실은 증축하여 책·걸상을 신조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을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공은 학교시설의 재건과 더불어 나라의 동량이 될 인재를 육성하기 위하여 도의교육을 강화하고 학생들의 실력향상에 힘썼다. 학생들은 행실을 바르게 하였으며 상급학교 진학률이 뛰어났다. 교사들에게는 새로운 학습방법을 연구케 하고 1교사 1연구를 추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수업을 공개하여 부단히 교육의 전문성을 제고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학교 재건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과 교육의 질적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1960년 1월 1일 녹조소성훈장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공의 뛰어난 지도력과 고매한 인격은 많은 교육동지와 시민의 존경과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1961년 3월에 대전시 교육위원회에서 제3대 교육감으로 당선되었다. 교육감으로 재임하는 동안 지방의회와의 원만한 관계를 이루어 일반행정으로부터 교육행정을 분리시켜 교육의 자주성과 재정예산의 독립성을 기하였다. 공은 대전시 인구의 자연증가와 도시집중 경향에 따라 급증하는 학생을 수용하기 위해 교사증축과 신설학교 설립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주체성을 고양시키는 교육을 추진하고 교원의 재교육 등에 탁월한 행정력을 발휘하였다. 교육감으로 재임하는 동안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교육자치제는 폐지되고 일반행정 관청에서 교육행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교육자치의 실종과 더불어 교육감에서 물러나야 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는 국운이었기에 선생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었다. 그후 대전 천동초등학교와 문창초등학교에서 4년, 대덕군 외삼초등학교에서 2년, 마지막으로 대전 갈마초등학교에서 2년 반을 근무하다가 1972년 8월에 정년퇴임을 하였다. 공은 훈도(교사)로 15년 5개월, 교육감, 교장으로 27년 도합 42개년의 반평생을 오로지 교육에 헌신하였다. 교육에 바친 선생의 생애는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깨우쳐 살아가는 힘을 길러서 모두 함께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는데 몸과 마음을 불태웠다. 공의 교육철학과 높은 경륜과 교육을 향한 정열은 수많은 제자와 후배교육동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대전시 교육발전의 주춧돌의 역할을 하였다. 정년퇴임 후에는 충청남도 삼락회 회장단 및 고문으로 있으면서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복지향상을 도모하였다. 또 학교교육을 적극 후원하였다. 공은 평생에 삼락을 누린 분이다. 어머니를 모시되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으며, 형제간의 우애 또한 돈독하였다.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내려다보아도 한점 부끄럼 없는 참된 생을 영위하였다. 효자요 교육자인 선생은 명문세족의 가통을 자손에게 전승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는 바 이들이 오늘날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주위에서의 선망의 가정이며, 자손들은 효성이 지극하여 선생이 세운 가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공은 1989년 86세의 천수로 선종하여 충남 공주군 의당면 율정리 추록에 안장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묘비가 서 있다. 비문은 충남대학교 교수인 문학박사 송백헌(宋百憲)이 짓고, 글씨는 국전 초대작가인 송암(松巖) 정대희(鄭台喜)가 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군자(君子)는 속(俗)되이 배부름과 평안(平安)함을 구(求)하지 아니하고 구차히 명리공명(名利功名)을 들지 않는다고 일컬었으며 진실로 이 길을 어찌 필부(匹夫)로서 쉬이 행할 수 있으랴. 여기 안빈호학(安貧好學)으로 자족(自足)하여 몸소 군자지도(君子之道)를 실천궁행(實踐躬行)한 참스승이 있으니 그 분이 곧 영암(暎岩) 심재갑선생(沈載甲先生)이다. 선생(先生)은 여조이래(麗朝以來) 누대(累代)에 걸쳐 고관진신(高官縉紳)을 수다(數多)히 배출한 잠영세족(簪纓世族) 청송심씨(靑松沈氏)의 후예(後裔)이며 시조(始祖) 휘(諱) 홍부공(洪孚公)의 이십오대손(二十五代孫)으로 一九0四年 六月 二十六日 세거지(世居地)인 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군(公州郡) 의당면(儀堂面) 율정리(栗亭里)에서 태어났으니 조선초(朝鮮初)의 좌상(左相) 정안공(定安公) 청성백(靑城伯) 휘(諱) 덕부(德符)는 선생(先生)의 이십일대조(二十一代租)이시고 세종(世宗)의 국구(國舅)이신 영상(領相) 안효공(安孝公) 휘(諱) 온(溫)은 이십대조(二十代組)이시고 명종조(明宗朝)의 거유(巨儒) 충혜공(忠惠公) 휘(諱) 연원(漣源)은 십육대조(十六代袒)가 되시며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청헌공(淸獻公) 휘(諱) 택현(宅賢)은 선생(先生)의 팔대조(代袒)가 되신다. 총명(聰明)과 재기(才氣)가 남달리 뛰어난 선생(先生)은 주위(周圍)의 촉망속에 부군(父君) 휘(諱) 봉섭(鳳燮)의 엄(嚴)한 훈도(訓導)로 유가(儒家)의 법도(法度)를 닦아 진작에 인자관후(仁慈寬厚)한 자품(姿稟)을 보이더니 장성(長成)함에 높은 덕망(德望)과 혼후(渾厚)한 문장(文章) 고매(高邁)한 인격(人格)으로 향리인당(鄕里隣黨)의 추앙(推仰)을 한 몸에 받았다. 일제강점(日帝强占)의 치욕(恥辱)을 직접 체험(體驗)한 선생(先生)은 국권회복(國權회復)의 지름길이 교육진흥(敎育振興)에 있음을 자각(自覺)하여 일찍이 충청남도(忠淸南道) 도립(道立)사법학교(師範學校)에서 학업(學業)을 마치자 사도실천(師道實踐)의 참 길을 농촌(農村)에서 찾아 십오성상(十五星霜)을 청양(靑陽), 연기(燕岐), 공주(公州) 등 오지(奧地) 보통학교(普通學校)에서 근무(勤務)하시며 농민자녀(農民子女)들의 학력증진(學力增進)과 민족정기(民族正氣)의 고양(高揚)에 청춘(靑春)을 불살랐다. 조국(祖國) 광복(光復)을 맞으매 독립한국(獨立韓國)의 국운(國運)은 보통교육(普通敎育)에서 갈음된다는 높은 뜻을 세워 영달(榮達)의 유혹(誘惑)을 물리치고 초등교육(初等敎育)의 일선(一線) 경영자(經營者)로서 강학훈도(講學訓導)의 선도자(先導者)로서 심혈(心血)을 기울였다. 이래(以來) 삼십여성상(三十余星霜)을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悲劇)과 정국(政局)의 잦은 변화에도 의연(毅然)히 학불염 교불권(學不厭 敎不倦)의 투철(透徹)한 신념(信念)으로 학교재건(學校再建)과 연학정진(硏學精進)의 지조(志操)있는 선비로서의 수범을 보였으니 一九六一年 第三代 대전시(大田市) 교육감(敎育監)과 퇴임후(退任後) 삼락회(三樂會) 고문(顧問)으로 추대(推戴)됨은 선생(先生)이 지니신 학덕(學德)을 추앙(推仰)함에서 연유됨이다. 재임중(在任中) 두 번의 대통령(大統領) 표창(表彰)과 녹조소성훈장(綠條素星勳章)을 받은 업적(業績)은 선생이 평소(平素)에 이룩한 교육공적(敎育功績)을 기리는 빛나는 표상(表象)이다. 一九七二年 八月 청아지로(菁莪之勞)를 마치매 그 뜻을 흠모(欽慕)하는 후학(後學)들의 행렬(行列)이 길을 메웠고, 선생(先生)의 향리(鄕里)인 율정(栗亭)에서는 청송심씨(靑松沈氏) 청헌공파(淸獻公波) 문중(門中)의 문장(門長)으로 숭조돈목(崇祖敦睦)의 전통(傳統)을 이음은 물론 후손(後孫)들의 미래(未來)를 염려(念慮)하고 계도(啓導)하심이 간절하여 경향각지(京鄕各地)에 인아친척(姻 親戚)의 존경(導敬)을 한 몸에 받으시었다. 一九八九年 86세의 천수(天壽)로 소천(召天)하시니 선생(先生)을 우러르는 이의 호곡(號哭)이 하늘에 닿았다. 부덕(婦德)과 인종(忍從)으로 가풍(家風)을 지켜온 현숙(賢淑)한 부인 김복남여사(金福男女史)와의 사이에 자랑스런 자녀(子女)와 여러 영손(令孫)이 있으니 복(福)되도다. 영암(暎岩) 가정(假定)이여, 빛나도다. 청헌공문중(淸獻公門中)이여. 선생(先生)이 가신지 주년(周年)을 맞아 부군(父君)의 유덕(遺德)을 금석(金石)에 새겨 오래도록 기리고자 한다는 효성(孝誠)스런 장남(長男) 심대평(沁大平) 도백(道伯)과 차남(次男) 대민(大民)의 간절한 뜻을 이서(二壻) 정태윤(鄭泰允) 교수(敎授)가 전하여 글을 청(請)하매 그 지성(至誠)과 효심(孝心)에 감복(感服)하여 불문(不文)이나마 무사(蕪辭)를 초(草)하니 세의(世誼)의 면면(綿綿)함을 새삼 느낄진저. 1990年 月 日 《자료 : 유족 제보》 《朴敬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