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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명 황운성(黃雲性)
생몰년대 1905∼1981
출생지 충남 연기군 전의면 고등리
출처
조회 7197 작성일 2003-10-23 00:00:00.0
첨부
상세정보 교육자. 호는 정재(靜齋), 본관은 창원(昌原), 1905년 11월 16일 충청남도(忠淸南道) 연기군(燕岐郡) 전의면(全義面) 고등리(高等里)에서 아버지 황배경(黃培敬)과 어머니 권영배(權永培)와의 사이에서 4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는 고향 연기(燕岐)에서, 1920년대 초반에는 충남 홍성읍(洪城邑)에서, 1924년 이후 해방될 때까지 진주시(晋州市), 부산시(釜山市), 남해군(南海郡) 등에서 살다가 해방후 다시 진주에 가서 살았다. 1962년 이후는 대전(大田)에서 살았고, 1971년 이후 1981년 작고할 때까지는 서울에서 살았다. 어려서 한학(漢學)에 밝은 조부로부터 서당에 수학(修學)하던 중, 아홉살 때 신학문에 대한 포부를 버릴 수 없어 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삭발, 보통학교(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 그 후, 1921년 공주공립농업학교(公州公立農業學校)를 졸업하고, 1924년에 관립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 농학과(農學課)를 졸업하였다. 수원고농(水原高農)을 수석으로 졸업하여 일본의 구주대학(九州大學) 농학부(農學部)에 입학이 허가되었으나 항일의식에 투철했던 조부(희연)의 반대로 진학을 포기하였다. 수원고농을 졸업하던 그 해 진주공립농업학교(晋州公立農業學校) 교유(敎諭)가 되어 약관(弱冠)의 젊은 나이에 공직생활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1934년 경상남도(慶尙南道) 내무부(內務部) 학무과(學務課)의 시학(視學)으로 승진 발령되었고, 이때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釜山公立女子高等普通學校)의 교유(敎諭)를 겸직하였다. 1940년 경상남도 남해군수(南海郡守), 1945년 진양군수(晉陽郡守)를 역임하였다. 해방후는 다시 교육계에 돌아와 그 해 10월, 진주공립농업학교장(晉州公立農業學校長), 1948년 진주공립농림학교 겸 진주공립중학교장(晉州公立中學校長)이 되었고, 같은 해, 도립 진주농과초급대학장(晉州農科初級大學長) 서리 겸 진주농림중학교장으로, 진주농과대학을 창립하는 업무를 추진하였으며, 1950년에는 도립진주농과초급대학 학장(學長)이 되어 우리나라 남부지역의 농업인재를 육성하였다. 또 1950년 10월에는 진주여자고등학교장(晉州女子高等學校長)을 겸직하게 되었고, 1952년에는 진주농림고등학교장도 겸하였다. 1956년 진주농과대학부설중등교원양성소장이 되어 질 높은 농업교사(農業敎師)양성에 힘썼고 1961년 고향인 충남으로 돌아와 서산농림고등학교(瑞山農林高等學校)의 교장이 되었다. 1962년 인문고등학교인 대전고등학교(大田高等學校) 교장으로 발령되어 근무하다가 시·도 단위 교육자치제(敎育自治制)의 실현으로 1964년 충청남도 교육위원회(敎育委員會) 초대 교육감(敎育監)으로 선출되었다. 학자적 양심과 온후한 인품을 지닌 그는 1968년까지 충남교육을 이끌어 나가면서 위 교육차치의 기반구축을 위해서 많은 애로를 슬기롭게 극복하였고, 특히 1966년 도교육위원회 청사를 준공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충남교육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황교육감은 취임과 함께 교육혁신운동 4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착실히 실천에 옮겼다. 혁신운동의 내용으로는 교원의 자질 향상을 위한 교직연수(敎職硏修) 강화, 1교1연구 풍토 조성, 교육환경 정비, 학교도서관 확충, 시청각자료의 정비활용, 어려운 학생에 대한 장학금 지급등에 역점을 두어 추진하였다. 또한 일반 교육시책으로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경제성장에 기여한 교육의 추진」이었다. 이를 위해서 향토학교(鄕土學校) 건설에 힘쓰고, 실업교육(實業敎育)을 강화하여 14개 농업고등학교의 실질적인 향상책으로 종합농장심사제(綜合農場審査制)를 실시하였고, 실과 담당교사의 실기지도 능력 향상을 위하여 문교부 주관으로 개최하는 3개월간의 장기강습에 실과교사(實科敎師) 들을 다수 참석시켰으며, 과학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해서 과거의 강의식 과학교육을 지양(止揚)하고 실험실습 관찰교육을 적극 권장하였다. 그밖의 시책으로 학력증진에도 진력한 바, 표준화검사의 활용등으로 학생실태 진단의 적정을 기하고 그에 따라 능력에 맞는 지도가 행하여지도록 배려하는 동시에 학습환경조건(學習環境條件)을 개선하고 자율적인 학습태도를 길러 학습성취의 기반을 튼튼히 하며 또 시청각교육의 보급, 프로그램학습의 도입을 비롯한 교육방법의 개선을 꾀하여 학습의 효율을 높이고자 힘썼다. 평소 「노력은 천재다」라고 강조하며 근면(勤勉), 성실(誠實), 노력(努力), 실천(實踐) 등을 좌우명으로 삼고 공직생활을 해왔던 황공(黃公)은 교육 행정관리자이기 전에 식물분류학(植物分類學)에 깊은 식견을 지니고 잇는 농학자(農學者)였다. 교육계 재직시 공로를 인정받아 1952년 교육공로상을 받고, 1955년에 송공비(頌功碑)가 진주농림고에 건립되었으며 1962년, 홍조소성훈장을 받았으며, 1967년 교육년공상(敎育年功賞)을 받았다. 같은 해 충남대학교(忠南大學校)로부터 명예농학박사(名譽農學博士) 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는 「한국농업교육사(韓國農業敎育史)」가 있다. 유족으로 미망인 임순교(任順敎)여사, 장남 규식(圭軾), 장녀 규자(圭子), 차녀 규숙(圭淑), 삼녀 양자(洋子), 4녀 규인(圭仁)이 있다. 묘소는 충남 홍성군 결성면 형산리에 있다. 《자료 : 유족 제보》 《柳武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