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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대전의 역사지명
출처 《大田地名誌》(大田直轄市史編纂委員會, 1994)
작성일 2005-05-12 00:00:00.0
조회 19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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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지명은 작은 지명으로부터 큰 지명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독특한 뜻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런데 지명의 대소(大小)관계도 결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어떤 지명은 보다 작은 단위로 격하되기도 하고, 어떤 지명은 보다 큰 단위로 승격되기도 한다. 우리 고장의 지명들이 이런 역사성을 가지고 부침하여 왔다.
실로 현재의 대전직할시의 행정구역 안에는 적어도 백제시대까지 소급되는 땅이름들이 여럿 있다. '우술군(雨述郡), 노사지현(奴斯只縣), 소비포현(所比浦縣), 진현현(辰峴縣)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우술군(雨述郡)은 비풍군(比豊郡)>회덕군(懷德郡)>회덕면(懷德面)>회덕동(懷德洞)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노사지(奴斯只)는 현재의 유성(儒城)으로, 소비포현(所比浦縣)은 현재의 덕진리(德津里)로, 진현현(眞峴縣)은 현재의 진잠동(眞岑洞)으로 격하되어 있다. 이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기술은 그 지명들이 속하여 있는 해당구의 지명 총설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앞뒤로 순차에 따라서 그 중복기술을 피하기 위함이다.
실로 우리의 고장 한밭(大田)은 최근에 와서야 한밭(대전(大田))>대전리(大田里)>대전면(大田面)>대전군(大田郡)>대전부(大田府)>대전시(大田市)>대전직할시(大田直轄市)
와 같이 큰 도시의 면모를 갖춘 유명한 땅이름으로 급격히 부상하여 지난 1993년에는 세계인의 이목(耳目)을 끄는 국제적인 행사로서의 세계무역박람회까지 훌륭하게 치르게 되었고 이어서 다가올 1996년 이후에는 11개의 정부청사가 중앙으로부터 이전되어 제 2 수도(首都)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렇듯 하루가 다르게 날로 날로 번창하여 가는 희망에 찬 '한밭'(대전(大田))이다.
그러면 왜 대전(大田)이 이처럼 번영하여 가는 것인가? 그 이유는 무어니 하여도 우선 이 고장의 위치가 국토의 중심부에 있기 때문에 교통의 요충지라는데 있다. 경기·충청의 중부지역과 영남과 호남을 연계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앞으로 대전(大田)과 진주(晉州) 사이의 고속도로가 뚫린다면 더더욱 완벽한 교통의 핵심이 될 것이다.
다음은 자연지리적 조건이 다른 어느 곳보다 우월하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한밭(대전(大田))을 다음과 같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기술하였다.
고을 동쪽에서 금강 남안을 돌아 계룡산의 배후가 되는 곳에서 겹쳐진 고개(중령(中嶺))를 넘으면 유성(儒城)의 대평야인데, 즉 계룡산 북동 모퉁이에 해당한다. 계룡산 남동마을(新都內)은 국초에 서울로 정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 동네의 물은 한 들 가운데를 구획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진산(珍山)의 옥계(玉溪)와 합치어 북으로 금강에 들어가는 데 갑천(甲川 : 회덕 서쪽 주암천(舟岩川)에 합하는 강)이라 이름한다. 내의 동쪽은 곧 회덕현(懷德縣)이고, 서쪽은 유성촌(儒城村)과 진잠현(鎭岑縣)이다. 동서의 두 산이 남쪽에서 평야를 끼고 돌아 북쪽에 이르러서 합치었고, 또 높게 사방을 산으로 막아 가운데를 둘러쌌다. 평평한 언덕과 산은 길고 구불어지고, 어여쁜 산기슭은 맑고 깨끗하다. 구봉산(九峯山)과 보문산(寶文山)이 남쪽에 높이 솟아 그 맑고 깨끗한 기상이 거의 한양의 동교(東郊)보다 낫다. 논밭은 극히 좋고 또 넓으나 다만 바다에서 다소 멀어 서쪽에 있는 강경(江景)에서 교역하는 것에 의지한다. 그러나 강경과의 거리는 백리를 넘지 않는다.
(自州東 循錦江南岸鷄龍背後 踰重嶺 爲儒城大野 卽鷄龍維也. 鷄龍南洞 國初欲都而未果. 是洞之水 畵一野之中 自西流 東與珍山玉溪合 北入錦江 名曰甲川. 川東 卽懷德縣 西卽儒城村及鎭岑縣也. 東西兩山 自南抱野 至北合又 高障四山 而環圍野中 平岡委蛇 嫩麓精秀 九峯山 與寶文山 聳峙於南 淸名氣像 殆過漢陽東郊. 田地極善且廣但海汀稍遠 西仰江景之輸易 然江不滿百里)
실로 우리 대전(大田)은 사람이 살면서 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천혜(天惠)의 복지(福地)이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알맞은 고도(高度)에 광활하게 펼쳐진 한밭들과 동서남북은 병풍처럼 두른 산들이 풍해를 막아 준다 또한 수해도 거의 없는 등 천재(天災)가 없는 낙원이다. 거기에다 역사의 젖줄인 금강이 도시의 등뒤로 유유히 흐르고 도시 한복판에는 세 가닥의 큰내가 흐리니 한밭내(대전천(大田川))에서 먼저 만나 하나되고 다시 성천(省川)과 만나 갑천(甲川)을 이루어 금강으로 가나니 하늘에서 내려다 본 대전(大田)의 산천(山川)은 과연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제3절 '한밭'의 유래와 그 한자지명(漢子地名)의 정통성(正統性)
1. 지명사적(地名史的) 고찰(考察)
(1) 고유지명과 한자 지명의 관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고장의 이름은 고유어인 '한밭'이었다. 우리나라에 한자(漢子)가 들어 오기전에도 우리의 조상들이 땅이름을 지어 불렀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한자(漢字)를 차용하여 적은 한자 지명보다는 훨씬 이른 시기 즉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우리말의 땅이름이 존재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증명하는 실례(實例)로 우리는 옛 땅이름 중 '셔블'(서벌(徐伐)=경주(慶州)), '소부리'(所夫里=부여(夫餘)), '고랑부리'(古良夫里=청양(靑陽)), '비사벌'(比斯伐=전주(全州)), '달구벌(達邱伐=대구(大邱)), '위례홀'(尉禮忽=한주(漢州)), '매홀'(買忽==수원(水原)), '미추홀'(彌鄒忽=인천(仁川)), '살매'(薩買=청주(淸州)), '무돌'(武珍=광주(光州)) 등의 아주 이른 시기의 땅이름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열거한 땅이름들의 예로 보아 알 수 있듯이 우리 조상들은 처음에는 한자(漢字)의 '새김'과 '음'을 차용하여 우리말의 고유명사를 적었다. 그리하여 사람의 이름, 땅의 이름들이 표기어로 남게 된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묵은 지명은 한자지명보다는 우리 지명이 훨씬 일찍 이 발생하였고 우리말 지명이 표기에 옮겨진 뒤부터 한자(漢字)의 '뜻과 음'을 빌어 적는 법에 따라서 우리말 지명이 표기되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 삼국시대에 이르러 고유지명이 한자어(漢字語)식 지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이 고장의 본 이름은 '한밭'이었고, 이 '한밭'을 한자어로 옮겨 적은 것이 곧 '대전(大田)'이다. 그러나 구어(口語)로는 내내 '한밭'이라 불려왔고 문어(文語)로는 '대전(大田)'으로 표기하여 왔을 뿐이다. 오늘날까지도 '한밭'과 '대전(大田)'이 공존하는 연유가 바로 이런 까닭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2) '한밭'과 한자지명(漢字地名)
여기서 우리가 이 고장의 전통지명인 '한밭'과 '대전(大田)'의 어원과 어의를 파악하고 나아가서 그 정통성(正統性)을 캐어보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큰밭', '넓은밭'이란 의미인 우리말 땅이름인 '한밭'이 한자어(漢字語)로 표기된 가장 이른 한자지명(漢字地名)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부르고 있는 지명인 '대전(大田)'이었음이 다음의 지지(地誌)등에서 확인된다.
(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성종(成宗) 17, 1486년 간) 제17권 공주목(公州牧) 조에
·유포천(柳浦川) : 유성현 동쪽 20리에 있다. 그 근원은 전라도 진산현(珍山縣) 지경에서 발하였다.
·성천(省川) : 유성현 동쪽 7리에 있는데 그 근원이 연산(連山), 진산(珍山) 두 고을 지경에서 발하여 합류하여 진잠현(鎭岑縣)을 지나 유성현 동쪽에 이르러 성천이 된다.
·대전천(大田川) : 유성현 동쪽 25리에 있으니 전라도 금산군(錦山郡) 경계에서 나왔다.
이상의 세 냇물이 합류하여 회덕현의 갑천(甲川)이 된다.
자료 1에서 확인하는 대전천(大田川)은 대전(大田)의 복판이나 주변에 이르는 하천(下川)이었기 때문에 지어진 땅이름이다.
따라서 이 대전천(大田川)은 땅이름 '대전(大田)'의 존재를 알려주는 으뜸가는 최초의 증거가 된다.
(나) 앞에서 제시한 동국여지승람보다 약 200여년 뒤에 기록된 문헌에 우리 고장의 한자지명이 귀중하게 나타난다.

「송서속습유」(宋書續拾遺) 부록 권2의 「초산일기(楚山日記)」에 나타나는 '대전(大田)'이 바로 그것이다. 이 '대전(大田)'은 이 고장의 한자지명을 확인하는데 너무나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에 「초산일기」의 해당 부분을 다음에 번역하여 소개하고 아울러 원문의 해당부분을 그대로 올리려 한다.

7월 11일(乙巳) 새벽 2시(축시)에 빈소를 파한 다음 조전(朝奠)과 상식(上食)을 올리고 나서 시신(柩)을 상여에 실은 다음 발인제를 지내고 바로 길을 떠나는 새벽 미명(未明)에 비바람이 치다가 오래지 않아 조금 개었다.
상여를 메는 등의 인부들의 담당은 주산(注山), 마산(馬山), 사현(沙峴), 와지(瓦旨) 등 4개 부락과 배달촌(白達村), 대전(大田), 사오(沙塢), 초동(草洞)에서 사창계(社倉契)가 차출(調出)하여 3연패로 나누어 번갈아 메고 동화동(東華洞)까지 갔는데 이덕원(李德遠) 등이 병풍과 차일을 냇가에 치고 기다리고 있기에 거기에 머물러 잠시 쉬었다.
앞의 자료 2인 「초산일기(楚山日記)」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장례에 관하여 제자가 그날 그날 필사한 일기이니 여러 마을 이름과 더불어 '대전(大田)'이 쓰였음을 확신할 수 있는 확증적인 자료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자료에서 '대전(大田)'을 비롯하여 '주산(注山), 마산(馬山), 사현(沙峴), 와지(瓦旨), 배달촌(白達村), 사오(沙塢), 초동(草洞)' 등 8개의 지명이 발견되는데 이것들은 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3∼41년 사이에 간행됨))에서
公州牧 山內面 瓦旨里 自官門東距九十里
懷德縣 縣內面 注山里 自官門東距十五里
懷德縣 外南面 草洞里 自官門南距二十五里
公州牧 鳴灘面 草塢浦里 自官門東北間距四五里
와 같이 와지리(瓦旨里), 주산리(注山里), 초동리(草洞里), 초오포리(草塢浦里)만이 행정 이명(里名)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당시에는 대전(大田)이 마산(馬山), 사현(沙峴), 배달촌(白達村)과 더불어 자연부락명에 불과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다) 또한 영조 27년(1751년)에 작성된 충주박씨의 별급문서(別級文書, 朴鎭昌 所藏)에도
山內面 大田九浦坪 字十七卜四沓四斗落賭租三石十五斗 其東邊沓七卜七二斗落
이란 기록이 다음과 같이 명기되어 있어 '대전'이 유일한 한자지명이었음을 입증하여 준다(자료 3 참조).
위 문서는 박민희(朴民熙 : 1687∼1756)가 아들의 무과(武科) 급제를 기뻐하여 9필지 36마지기의 토지를 별급(別給)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위의 문서를 작성한 당시(건융 16년 1751)에 이 고장의 한자지명이 '대전(大田)'이었음을 알려주는 확증 자료라 할 수 있다.
(라) 다음은 서유구(徐, 순조(純祖) 27, 1827)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五)의 倪圭志 卷第四 八域場市 중에 다음과 같이 대전장(大田場)이 공주목에서 동쪽 70리에 있는 산내면(山內面)의 '대전(大田)'에 2일에 7일에 선다고 기록하였다. 여기 대전장(大田場)은 '대전(大田)'에 서는 닷새장을 이름이니 대전이란 한자지명을 알려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자료 4 참조).
(마) 호서읍지(湖西邑誌)
공주지(公州誌) 권2(철종(哲宗) 10년, 1859)와 또 다른 공주목지도(公州牧地圖), 임신(壬申) 1872 조하(肇夏))에 대전시(大田市) 혹은 대전장(大田場)이 2일과 7일에 산내면(山內面)의 '대전리(大田里)'에 섰던 사실을 알려 준다(자료 5 참조).
(바)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誌, 哲宗 14년, 1863) 권5 공주의 산수(山水)에 갑천(甲川), 성천(省川), 대전천(大田川), 유포천(柳浦川)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다른 옛 문헌과는 약간 다르게 대전천(大田川)의 별칭으로 '일운(一云) 관전천(官田川)'이 나온다 이 '관전천(官田川)'의 관전(官田)'에 대한 풀이는 뒤로 미룬다. 여기에서도 '대전(大田)'의 천(川(한밭의 내))이란 의미로 '대전천(大田川)'이라 한 것이니 한자지명이 '대전(大田)'임을 극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자료 6 참조).
(사) 구한말(舊韓末) 고종 32년(高宗 32, 1895)에 지방관제(地方官制)를 개정(改定)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밭(대전(大田))'은 가장 작은 행정 단위의 지명인 대전리(大田里(회덕군 산내면))로 승격(昇格)하게 된다. 그리고 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의 '충청도(忠淸道)의 적세(賊勢)'라는 제목(1895. 12. 27일자) 밑에 '공주(公州)·소전(蘇田)·회덕(懷德)·대전(大田)'이란 표기가 나타나 역시 '대전(大田)'을 확인하게 한다.
여기에서 교유지명 '한밭'을 한어화(漢語化)한 한자지명(漢字地名)이 '대전(大田)'이었고 이 '대전(大田)'이야말로 이 고장의 전통(혹은 정통(正統)) 한자(漢字) 지명(地名)임을 확증(確證)하는 구한말(舊漢末)의 공식적인 자료를 다음에 제시한다. 고종실록(高宗實錄(권 32))의 고종(高宗) 31년(갑오(甲午) 1894) 10월조에 '대전(大田)'이 나온다(자료 7 참조)
이로부터 5년 뒤인 고종실록(高宗實錄(권 39))의 광무(光武 3년(1899년) 조에도 역시 '대전(大田)'이 등장한다.(자료 8 참조).
더욱 확실한 것은 순종황제실록(純宗皇帝實錄) 목록(目錄)(권1)의 융희(隆熙) 3년(1909) 13일조에도 '대전(大田)'으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 기사를 왜곡하여 전통지명(傳統地名)이 '태전(太田)'이었다고 허위 날조한 문제는 뒤에서 자세히 논의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우선 해당 자료만을 제시하고 그대로 넘어가기로 하겠다(자료 9 참조).
이 뒤로 일제(日帝)의 군·면폐합(郡·面廢合)에 의하여 대전리(大田里)가 대전면(大田面)으로, 1931년에도 대전읍(大田邑)으로, 1935년에는 대전부(大田府)로도 격상되었고, 1948년에는 대한민국의 대전시(大田市)로, 1989년 대전직할시(大田直轄市)로 격상하게 되었다.
대전(大田)의 변천내력을 표로 작성하여 보기에 편하게 하면 다음과 같다.
(3) '대전(大田)'과 '태전(太田)'의 공존기시(共存時期)
앞에서 우리가 옛 문헌에서 찾아 낸 실증자료(實證資料)를 통하여 '한밭'이 표기된 때로부터 계산하여도 줄잡아 500여년 동안이나 전통적으로 부단히 사용하여 온 한자지명(漢字地名)이 '대전(大田)'임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대전(大田)'과 다른 '태전(太田)'이란 한자지명은 그것이 나타난 이후 비교적 단명(短命 : 약 7∼8년 간)한 지명이었음이 다음의 자료에 의하여 확증된다.
앞의 자료를 근거로 하여 '大田'과 '太田'의 관계를 보기에 편하도록 다시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앞의 비교표가 알려주는 바와 같이 '태전(太田)'이 등장하는 시기는 망국조약(亡國條約)을 맺은 乙巳年(1905)보다 1년전이다. 그리고 이른바 경술합방(庚戌合邦)으로 망국(亡國)의 한(恨)을 남긴 1910년에 '태전(太田)'은 공식적인 기록에서 사라진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그것도 일제(日帝)의 통치기간(統治其間)의 초기에 잠시 사용된 흔적만을 가지고 그것이 전통지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큰 잘못이다. 애초에는 고유지명였던 '한밭'을 한자(漢字)로 표기된 '대전(大田)'은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어느 한 시기에도 쓰이지 않는 일이 없어 500여년 동안 부단히 계승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우리가 확인한 겨우 7년여 동안만 공식적으로 표기되어 나타난 '태전(太田)'을 이 고장의 전통적인 한자지명(漢字地名)인 것처럼 주장하거나 착각하게 만든 직접적인 이유가 두 가지 있는 듯하다.
그 하나는 일인(日人) 전중시지조(田中市之助)가 지은 「조선대전발전지(朝鮮大田發展誌)」(1917年) 154쪽에 이등박문(伊藤博文) 통감이 「'태전(太田)'을 '대전(大田)'으로 부르도록 하라」는 명령에 의하여 본래의 지명 '태전(太田)'이 '대전(大田)'으로 바뀌었다고 중장한데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면 우선 해당 내용을 다음에 소개하고 이 기사의 내용에 대한 진위(眞僞)를 판별하기로 하겠다(자료 10 참조).
도대체 일인(日人) 전중(田中)이 어떤 근거에서 이런 터무니없는 괴변을 남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전중(田中)은 주장의 근거를 「명치(明治)」42년(1909년) 1월 한황제(韓皇帝(純宗))」의 남선순유(南鮮巡遊)의 행차시에 이등공(伊藤公)이 수행하여…」에 두고 있으나 앞에서 제시한 당시의 순종실록(純宗實錄)에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앞의 명치(明治) 42년 1월은 순종(純宗) 3년(1909년) 1월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앞에서 제시한 「순종황제실록(純宗皇帝實錄)」목록(目錄) 권(卷) 1의 융희(隆熙) 3년(1909년) 1월조에는
2일에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접견(接見)하였고, 13일에 '대전(大田)'에 도착하시어 충청남북도의 관찰사를 부르시어 접견하시고….(二日 觀德壽官 接見銃監二藤博文…十三日進發至大田 召見忠靑南北觀察使及搢紳有勅諭 進發着南大門 伋觀德壽宮 還宮)
와 같이 통감 이등(伊藤)이 순종황제(純宗皇帝)를 수행한 내용도 없고 '태전(太田)'을 '대전(大田)'으로 고쳐 부르라고 명령한 내용도 없다. 오로지 순종(純宗)께서 '대전(大田)'에 이르러서 충청남북(忠淸南北)의 관찰사를 부르신 사실 등만이 적혀 있을 뿐이다. 도대체 전중(田中)이 어떤 근거로 그런 터무니 없는 내용을 조작하여 남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전중(田中)이 주장하는 근거가 「순종실록(純宗實錄)」에 없을 뿐만 아니라 전중(田中)이 기술한 내용 자체만 가지고도 앞뒤가 맞지 않는 또 다른 모순을 발견할 수 잇다. 만일 전중(田中)의 주장대로라면 이등(伊藤) 통감이 '태전(太田)'을 '대전(大田)'으로 바꾸라고 명한 시기가 서기 1909년(명치(明治) 42년)인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대전(大田)'이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이등(伊藤) 명한 때로부터 '대전(大田)'이 비롯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전(大田)'은 앞에서 제시한 「고종실록(高宗實錄)」의 1894년조와 1899년조에도 나타나며 「순종실록(純宗實錄)」의 1909년조에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동국여지승람」(1486년)부터 500여년이나 끊임없이 존속하여 왔고 더욱이 바로 1년전인 1908년에 이미 '태전우체국(太田郵遞局)'으로 개정(改定)한 사실을 통감부(統監府) 공보(公報) 45호(3월 14일자)가 증언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시 통감부공보 57호(6월 6일자)에서도 '태전(太田)'을 '대전(大田)'으로 개정(改定)한 사실이 확인된다, 더더구나 서슬이 퍼런 통감의 하명이었다면 이등(伊藤)통감이 엄명한 1909 이후에는 '태전(太田)'이 적어도 관보(官報)에는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앞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1910년 5월 4일자 관보(官報) 4669호에 '태전경찰서(太田警察署)'가 버젓이 나타난다 그럴 뿐만 아니라 194년에 삼성당(三省堂)에서 일인(日人)들이 펴낸 「조선지도(朝鮮地圖)」에도 다음 지도에서 확인하는 바와 같이 '태전(太田)'이 나타난다. 이 지도를 한국인이 발행하였다면 모르되 일인(日人)들이 감히 통감이 명령한 사실을 어기고 이렇게 '태전(太田)'으로 표기할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일인(日人)들이 전통적인 한자명인 '대전(大田)'보다 '태전(太田)'을 선호(選好)한 탓으로 봄이 온당할 것이다(지도 2 참조).
무릇 '태전(太田)'이란 한자지명은 오히려 일인(日人)들이 즐겨 쓰는 땅이름이다. 왜냐하면 일본에는 '태전(太田)'이란 땅이름이 많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되려 일인(日人)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시기 이후에 '태전(太田)'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며 한때에는 관보에까지 적극적으로 쓰다가 우리의 전통적인 한자지명인 '대전(大田)'에 밀려 스스로 자멸한 것이다. 그러나 자멸한 것이다. 그러나 일인(日人)들은 엽서나 편지의 겉봉에 '태전(太田)'을 즐겨 사용하였다고 한다(김영한(金英漢)씨 증언). 이런 흔적인 다음 일인(日人)이 손으로 그린 남북선관람지도(南北鮮觀覽地圖)에 나타난 '태전(太田)'이다(지도 3 참조).
이 지도는 필자가 고서점에서 우연히 입수한 것인데 작도한 연대가 없음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관람지도(觀覽地圖)이니만큼 일인(日人)들이 왕래가 매우 자유롭던 시기의 지도임에 틀림없으니 늦어도 1920년대 이후의 지도일 것이다. 그런데 일부에서 주장하는 바의 금지된 지명인 '태전(太田)'이 버젓이 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의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의 법학부 학생들이 최근(1993년 9월 5∼10일)에 충남대학교를 방문한 일정(日程 : 案)에도 다음과 같이 '태전(太田)'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일인(日人)이 부르기를 좋아하였던 이 고장의 땅이름이 오히려 '태전(太田)'이었음을 재확인할 수가 있다(자료 11 참조).

(4) 잘못 풀이한 내용과 그 원인

한편 '태전(太田)'이 '대전(大田)'보다 이른 시기에 발생한 것으로 주장하는 근거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태종(太宗 13년조(年條)에 '태전(太田)'이 나타난다고 들었다. 이런 주장은 「한국지명요람(한국지리원 1983)」,「동아세계백과사전(동아출판사 1986)」,「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에서 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필자의 문맥을 잘못 이해한 탓으로 그리된 것임을 뒤에서 밝힐 것임).
과연 그런가를 여기서 면밀히 검토하여 보자. 우리가 「태종실록(太宗實錄)」13년조(年條)에서 아무리 '태전(太田)'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다음에 제시하는 원본에 그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자료 12 참조).
위 기사는 태종(太宗) 13년 10월에 각 도(道)와 각 관(官)의 호칭을 개칭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세종실록(世宗實錄)(卷 149))」지리지(地理志)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자료 13 참조).
무릇 太宗 때에는 현(縣)단위의 행정지명이 아니었던 지명인데 '대전(大田)'이든 '태전(太田)'이든 왕조실록이나 그 지리지에 등재될 리가 만무하다. 그 당시의 이 고장의 행정지명은 위의 두 자료가 보여주듯이 '회덕(懷德)'이었을 뿐이다. 다만 '대전(大田)'은 그저 평범한 자연부락이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단위 이상의 지명이 아니면 기록으로 남기 어렵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서는 리명(里名)까지도 기록된 일이 있다. 예를 들면 앞의 「세종실록」 회덕현조(懷德縣條)의 말미부에서 「驛一貞民(俗訛田民)…越境處城東村郞山里 越入縣南面」에서 오늘의 전민동(田民洞)의 전신인 정민역(貞民驛(혹은 전민역(田民驛))을 발견할 수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대전(大田)에 대한 당시의 명칭은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태종실록(太宗實錄)」에 '태전(太田)'이 나타나는 것처럼 착각하기에 이르는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이른바 '대전(大田)'에 있던 호남일보(湖南日報)가 발간한 「충청남도발전사(忠淸南道發展史)」(1993.3, p.387)에서 '태전(太田)'이 '대전(大田)'으로 바뀐 대목을 「한밭승람」(호서문학사(湖西文化史) 간(刊), 1972, pp.112∼113)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인용된 원문대로이다).
「이또오」는 노·일전쟁(露·日戰爭)에서 승리(勝利)한 도취감에 싸여 1905년 12월 초대 「통감(統監)」으로 한국(韓國)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후 서울에서 얼마전 겨우 개통을 본 경·부선(京·釜線) 특별열차를 타고 부산(釜山)까지 지방 시찰을 떠났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총칼로 위협하여 실질적으로는 이 나라 주권(主權)을 탈취하는 「통감부(統監府)」를 세우고 그 초대(初代) 통감(統監)으로 열차(列車)에 오른 「이또오」는 일본(日本) 수상을 역임하고 동양(東洋)을 주무르는 실력을 과시하듯 흰수염을 나부끼며 달리는 차창(車窓)밖으로 한국(韓國)의 풍물을 야심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열차(列車)가 대전역(大田驛)에 물을 넣기위해 잠시 멎었다. 열차(列車)가 서자 「이또오」는 넓은 평원에 유독 돋보이는 일본인(日本人)들의 집단마을이 인상적이어서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 보니 넓은 들과 아름다운 산세가 열차(列車)안에서 보다 훨씬 좋게 보였다.
『여기가 어딘가?』
「이또오」는 옆에 서 있는 역장(驛長)에게 물었다.
『태전(太田)이라고 합니다』
역장(驛長)의 대답이었다. 그러자 「이또오」는 『아니야 태전(太田)보다는 형승웅위(形勝雄偉)한 지세를 나타내는데는 대전(大田)이 좋아 앞으로는 태전(太田)이라 하지말고 대전(大田)으로 고쳐 부르게 하시오』
하고 통감부(統監府)에서 수행온 관리에게 지시했다.
이때부터 태전역(太田驛)은 대전역(大田驛)으로 부르게 됐고 그후 면(面)이 설치되자 대전면(大田面)이라 하는 등 「대전(大田)」은 이땅의 이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또오」의 머릿속에서는 이땅에 일본인(日本人)의 도시가 세워질 꿈이 순간적으로 스쳐갔을 것이고 일본인(日本人) 도시(都市)에 어울리는 이름은 「태전(太田)」보다는 「대전(大田)」이 더 일본식(日本式) 지명(地名)에 가깝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태전(太田)」을 「대전(大田)」으로 바꾸어 버린 「이또오」는 서울에 올라가 병약(病弱)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순종(純宗)황제를 꼭두각시처럼 앞에 내세워 지방(地方)순행을 하도록 했다.
비슷한 내용이 대전직할시(大田直轄市(한민출판사, 1990,p.86))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었다.
태전(太田)이 대전(大田)으로 지명(地名)이 변한데 대해서 1932년도 호남일보(湖南日報)가 발행(發行)한 충청남도발전사(忠淸南道發展史)엔 우리나라 침략(侵略)이 원흉(元兇) 당시(當時) 통감(統監)이었던 이등박문(二等博文)이 대전(大田)을 자나다가 이곳의 형승웅위(形勝雄偉)함을 보고 태전(太田)을 대전(大田)으로 바꾸어 부르도록 하였다는 기록(記錄(3829))은 있으나 믿을만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믿을만한 것인지」라고 의문시하고 있음이 저 앞의 인용태도와는 다르다. 다음의 두 책은 그나마 아무런 근거도 대지 않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밭의 얼」(대전직할시 간(刊), 1991.1, p.480)에서 옮긴다.
16. 정동(貞洞)
대전역 전 큰 벌판을 이룬 지역으로 한밭, 태전(太田)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대전역이 들어서기 전에는 대전천(大田川)이 범람에서 모래사장을 이루어 콩을 뿌리고 거두는 콩밭의 지대였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초기(初期)에는 공주군(公州郡) 산내면(山內面)의 지역이었다.
그리고 「한반정신(精神)의 뿌리와 창조(創造)」(대전직할시 발행, 1991.5, p.174)에서 옮긴다.
"대전(大田)"이란 지명(地名)을 한자식(漢字式) 표기로 "태전(太田)"이라 쓴 것을 한일합방 이후 1905년 경부선 철도역을 이곳에도 지은 일본사람에 의해 "대전(大田)"이라 고쳐부른 후부터 지금까지 불려오고 잇다. 지금의 대전도시(大田都市)도 옛날부터 꾸준히 발전되어 형성된 도시가 아니고, 한일합방 이후 대전역을 중심으로 발전되다가 현대(現代)에 이르러 급속도로 발전해 온 도시이다.
위의 두 기술 내용이 사실과 다름은 다음의 기술 내용의 검토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大田市誌(中)」(대전시 발행, 1879, p.219∼220)에서 옮긴다.
「대전(大田)」이 지방행정구역(地方行政區域)의 명칭(名稱)으로 등장(登場)하기는 최근인 1900년 초의 일이고, 그 이전에는 「한밭」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밭」이란 이름은 「큰 들」또는 「넒은 들」이란 뜻으로서 대전(大田)이란 지명(地名)도 「한밭」의 원명(原名)을 의역(意譯)한 것이다. 처음에는 태전(太田)이라고 했다가 뒤에 대전(大田)으로 고친 것이지만, 문헌상(文獻上)에 나타난 것을 보면 "大田川 在儒城縣東二十五里 源出全羅道 錦山郡 地界 巳上三川 合流爲 懷德縣之甲川"이라한 대전천(大田川)은 현재(現在)의 대전천(大田川)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대전(大田)이란 명칭(名稱)은 5백년 전 이조 초(李朝初)에도 불리워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전시지(大田市誌))상권(上卷))」(1984.12, p.655)에 앞의 내용이 그대로 전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두 곳의 콤마(,)를 찍지 않고 마지막에 문단만 하나 더 늘린 점만 다르다.
앞에서 제시한 대전시지(大田市誌)의 내용은 스스로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기술을 하고 있다. 일에 부분에서는 「처음에는 태전(太田)」이라고 했다가 뒤에 대전(大田)으로 고친 것이지만」이라고 전제하여 놓고 이어서 「문헌상(文獻上)」에 타나난 것을 보면…대전(大田)이란 명칭(名稱)은 오백년전(五百年前) 이조초(李朝初)에도 불리워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모순된 기술을 하였다. 앞의 기술이 모순되지 않으려면 '태전(太田)'이란 명칭이 적어도 오백년(五百年) 이전에 존재하였어야 할 터인데 앞에서 제시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오백년(五百年) 이전의 문헌에는 고사하고 1900년대 이전의 문헌에서 조차도 '태전(太田)'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논의하여 온 바와 같이 이 고장의 고유어 지명인 '한밭'을 한어(漢語)식 지명으로 표기한 '대전(大田)'은 줄잡아 500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진 전통성이 있는 한자 지명(漢字地名)인 바(물론 이것에 대한 원초 지명(原初地名)은 '한밭'이었기 때문에 둘이 내내 공존(共存) 하여 왔지만) 앞에서 제시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04년에 '태전(太田)'이 등장하게 되어 단기간(약 7년간 공보 등에 나타남) 혼용되다 보니 '한밭·대전(大田)'의 뿌리를 잘 모르는 처지에서 마치 '태전(太田)' 전통지명인 것처럼 주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줄 수도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상에서 논의하고, 때로는 면밀히 검토한 내용들이 깊이 살펴보지도 않고 잘못 기술한 선생의 주장들을 액면 그대로 믿고 이를 토대로 동일한 오류를 범한 사실을 이른바 권위(?)있는 백과사전에서 재차 소개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지명을 다룬 요람이나 백과사전에 나타난 '태전(太田)'의 문제를 면밀히 검토하여 보도록 하겠다.
우선 그 내용들을 간행 연대 순서대로 다음에 제시한다.
(가) 「한국지명요람(韓國地名要覽)」(1982, 1983 재판, 국립지리원, p.325)
대전시[대전시(大田市) : Daejeon Si](한밭, 대전, 대전부) 면적 87.36㎢, 인구651,642인.
[위치] 서울에서 남으로 167.3㎞, 부산에서 북으로 238.2㎞, 시(市)전체가 대덕군에 의해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 지리 좌표는 N36。22', E127。28'∼127∼21'
[연혁] 본래 마한에 속하였다가 백제 때 우술군(雨述郡), 신라 때 비풍군(比豊郡), 고려 때 회덕현(懷德縣)과 진잠현(鎭岑縣)으로 나뉘었다. 이조(李朝) 태종(太宗(1413)) 때 회덕군과 진잠군으로 개칭, 일명 태전(太田)「한밭」이라고도 하였다.
위 글의 내용을 언뜻 보면 마치 太宗 13년에 「회덕현(懷德縣)」과 진잠현(鎭岑縣)을 '회덕군과 잠잠군'으로 개칭하였고 '태전(太田)'(한밭)이라고도 하였다」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위 (가)의 글을 쓴 이는 "ⓐ회덕군과 잠잠군으로 개칭, ⓑ일명 태전(太田)「한밭」이라고도 하였다"와 같이(밑줄과ⓐⓑ는 필자) ⓐ와ⓑ 사이에 콤마(,)를 찍었다. 따라서 ⓑ는 ⓐ의 내용과 관계가 없는 별도의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의 필자는 '일명…이라고도 하였다'는 표현으로 '한밭' 혹은 '대전(大田)'에 대한 별칭으로 '태전(太田)'이 한 때 쓰인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가)의 필자는 '대전시[대전시(大田市) : Daejeon Si](한밭, 대전, 대전부)'라고 머리에 제시한 내용에 '태전(太田)'을 넣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일명 '태전(太田)'을 앞에서 제시한 서기 1904~1910년 사이에 잠시 사용한 지명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나)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1986 4판, 동아출판사, p.575)
고려시대에는 회덕현(懷德縣)과 진잠현(鎭岑縣)으로 나뉘었다. 1017년(현종 8)에는 공주 관하(管下)에 속하였고, 1172년(명종 2에는 현감(縣監)을 두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13년(태종 13)에는 회덕군(懷德郡)과 진잠군(鎭岑郡)으로 개칭하고 일명 태전(太田)이라고도 하였다.
(나)의 내용을 (가)의 내용과 비교할 때 동일함을 확인하게 된다. 다만 (가)는 콤마(,)가 있는데 (나)는 그것이 없다. 그리하여 더욱 더 '회덕군과 진잠군으로 개창하고'와 '일명 태전이라고도 하였다'가 동일 문맥상의 앞뒤 사실이 직접 연결되는 것처럼 오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따라서 콤마(,)가 빠진 것으로 보아야 옳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도 '일명 太田'은 태종 13년의 존재가 아니라 서기 1904∼1910년 사이에 일시적으로 나타난 별지명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100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458)
[조선] 1413년(태종 13) 전국을 8도로 하여 군현을 개편할 때 대전지방은 공주 군·진잠군의 일부에 속하고 태전(太田 : 한밭)이라 불렸다.
(다)의 내용에 이르러서는 아예 태종 13년(서기1423년)부터 이 고장(한밭)의 한자어 지명이 '태전(太田)'이라고 불렸다고 단정하고 있다. 앞에서 제시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는 전혀 없는 사실을 허위로 조작한 내용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적 사업으로 이룩한 가장 권위가 있다는 백과사전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하고 보니 사회에 끼는 악영향이 얼마나 클 것인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명사적(地名史的)인 측면에서 우리 고장의 전통지명(傳統地名)이 무엇인가를 고찰하였다. 이 고장의 고유한 땅이름은 '한밭'이고 이것은 한자어(漢字語)식으로 바꾸어 표기한 지명이 '대전(大田)'임을 재삼 확인하였다. 물론 최초의 땅이름은 '한밭'이었는데 이것이 한자어(漢字語)로 표기되어 처음 나타나는 문헌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1486))이다. 따라서 그 근거가 확실한 1486년부터 계산한다면 지금까지 '대전(大田)'은 장장 507년간이나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정통(正統)한 한자 지명(漢字地名)이라 확언할 수 있다. 그리고 '태전(太田)'은 관보에 잠시(약7년 간) 나타났다가 사라진 그러나 일인(日人)에 의하여 가끔 쓰인 전통성이 없는 한자지명(漢字地名)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를 '일명'이라 부른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2. '한밭'과 대전(大田)'의 어휘사적 풀이

(1) 지명어의 발생·변화와 사용습관
우리의 지명들은 일반적으로 고유지명이 있고 이 고유지명을 한자어(漢字語)식으로 개정한 한자(漢字)지명이 있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한밭→대전(大田), 한절골→대사동(大寺洞), 돌다리→석교(石橋), 갓 골→변동(邊洞), 안 골→내동(內洞), 버드내→유등천(柳等川), 대실→죽곡(竹谷), 감나무골→시목리(枾木里), 숯골→탄동(炭洞), 못 골→지곡(池谷), 까치재→작현(鵲峴), 으능정이→은행동(銀杏洞),
한우물→대정동(大井洞), 잣뒤→성치(城峙), 가는골→세동(細洞), 활골→궁동(弓洞), 샘 골→천동(泉洞), 새탐말→신흥동(新興洞), 진 골→장동(長洞), 놋즌골→유동(鍮洞), 울바우→명암(鳴岩), 바리바우→발암(鉢岩), 검든들→흑석(黑石 : 琴坪), 배나무골→이목동(梨木洞),
용머리→용두동(龍頭洞)→, 닭재→계현(鷄峴), 가래울→추동(楸洞), 미리미→용촌(龍村), 느다리→판교(板橋), 소들→효평(孝坪), 가는내→세천(細川), 쑥내→애천(艾川), 말 뫼→마산(馬山洞), 숯뱅이→탄방(炭坊), 새 울→신탄(新灘), 쇠울→금탄(金灘), 새 골→조동(鳥洞), 남달미→목달동(木達洞), 방아미→침산동(砧山洞), 범골→호동(虎洞), 개대가리산성→견두산성(犬頭山城)
앞의 예와 같이 두 가지 지명이 존재할 경우에는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 먼저 발생하였고 한자 지명(漢字地名)은 고유 지명을 어느 시기엔가 뒤에 한자화(漢字化)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자(漢字)가 우리나라에 수입되기 이전부터 우리말의 고유지명을 우리의 조상들이 사용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이런 보편적인 원리에 따라서 '한밭'이 보다 훨씬 오래 묵은 이 고장의 본 지명이며 '大田'보다 후대에 발생한 한자(漢字) 지명인 것이다.
그러면 '한밭'과 '대전(大田)'은 어휘사적인 면에서 볼 때 어떤 대응관계가 잇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무릇 '한밭'의 '한'에 대한 대응 표기의 한자(漢字)는 '대(大)'자이었다. 이처럼 '대(大)'자로 표기한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비롯된 전통적인 관습임을 다음의 여러 가지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 신라의 관직명을 「삼국사기」권 38 직관(職官(上))에 유리왕(儒理王) 9년에 관직을 17등급으로 나누어 제정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 '대사(大舍)'를 혹은 '한사(韓舍)'라고 호칭한다라고 하였다(十二曰大舍 或云韓舍)' 그럴뿐만 아니라 '대내마(大奈麻)'(十등급)가 '한내마(韓奈麻)'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신라 유리왕 9년이면 서기 32년에 해당하니 참으로 그 역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나) 지명 표기에서는 '한'의 대응 표기자가 오로지 '대(大)'임을 확인할 수 있다.
1) 옛지명에서
韓 山→大 山(三國史記 地理3 1145)
漢 山→大 山(大東地志 1864)
한여흘→大灘(龍飛御天歌 제14장, 제33장 1445)
2) 전래지명(傳來地名)에서
한 내→大 天 한 골→大 洞
한머리→大頭里 한다리내→大橋川
한 뫼→大 山 한 재→大 峙
한절골→大寺洞 한 밤 이→大栗里
한뿔이→大角里 한 갓 골→大枝洞
한 실→大 谷 한 티 골→大峙洞
한새골→大鳥谷 한 박 실→大朴里
한가래기→大加里 한 우 물→大井洞
위와같이 지명에서도 고유어 '한'은 '대(大)'로 대응 표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용비어천가(1445) 권8 제67장에서 '한비'를 '대우(大雨)'라 하여 역시 '대(大)'가 고유어 '한'에 대응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난 옛학자들이 모두한글이 태어나기 전의 옛날에 한자의 음을 차용하여 적은 '한(韓)', 한(漢), 간(干), 한(翰), 감(邯), 건( )'은 모두 '한'이며 이 '한'은 '大'의 뜻과 같다고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ㄱ) 我國方言 謂種蔬者爲園頭干 漁採者爲漁夫干 造泡者爲豆腐干 大抵爲干故也(李 光 : 芝峯類說)
(ㄴ) 漢山卽黔舟山 方言稱大曰漢猶言大山(金井浩 : 大東地志 廣州沿革條, 1864)
(ㄷ) 東韓八自以爲大且多故謂大謂한者卽韓之稱也(作者未詳 : 東言考略 古談條)
(ㄹ) 한극학회발행 큰사전(1957)에는 '한' : 명사위에 붙어서 '큼'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한가위, 한글, 한길(大路), 한가람(漢江), 한숨(大息)'이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라) '밭'에 대한 대응 표기 한자
'밭'에 관한 한자의 대응 표기를 찾아보면 '대■ : 竹田(용비어천가 제 33장), '삼받개:삼전도(三田渡)'(용비어천가 제14장) 등과 같이 '밭=田'으로 대응 표기되어 나타난다. 이 밖에도 '받■다■리며:치전(治田)'(여씨향약(呂氏鄕約)), '받뎐:전(田)'(훈몽자회(訓蒙字會) 1527)와 같은 기록에 의거하여 '밭'을 '전(田)'으로 옮겨 적었음이 확인된다.
앞에서 우리는 '한'과 '밭'을 한자(漢字)로 옮겨 적은 글자가 '대(大)'와 '전(田)'임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한밭'이란 전통적인 한자(漢字) 표기는' 대전(大田)'임에 틀림없다. 그 근거를 우리는 앞에서 여러 가지 옛 문헌에서 제시하였으니 더욱 확실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에 분포하여 있는 '한밭'이란 지명들이 한결 같이 '대전(大田)'이라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그 실례를 들면
·포천군(抱川郡) 청송면(靑松面)의 '한밭 : 대전리(大田里)'
·상주군(尙州郡) 외서면(外書面)의 '한밭 : 대전리(大田里)'
·단양군(丹陽郡) 어상천면(漁上川面)의 '한밭 : 대전리(大田里)'
등과 같이 '한밭'에 대한 한자지명(漢字地名)은 모두가 '대전(大田)'일 뿐이다.
3. 「한밭」과 「大田」의 형성발달(形成發達)
(1) 지명(地名)의 명명법(命名法)
'옥계동(玉溪洞)'은 옥계(玉溪)가 있기 때문에 그로 인(因)하여 지어진 지명이다. '삼천동(三川洞)'은 세내가 합하는 곳이기 때문에 명명(命名)된 지명이다. '석교동(石橋洞)'은 그 곳에 '돌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지명이다. '유등천(柳等川(柳川))'은 그곳에 '벌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천명(川名)이다. 마찬가지로 '대전천(大田川)'은 '대전(大田)'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 가운데나 아니면 변두리를 흐르는 내란 뜻으로 명명(命名)된 천명(川名)이다. 또한 고문헌(古文獻)에 나타나는 '대전장(大田場)·대전시(大田市)' 역시 '대전(大田)'이란 지명(地名)이 먼저 형성(形成)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시장명(市長名)이다.
(2) '대전(大田)'의 호칭(呼稱)
고유지명과 한자지명(漢字地名)이 공조(共存)할 때는 지금과는 달리 약 반세기 전까지만 하여도 주로 고유지명을 불렀다. 말하자면 '유등천(柳等川)'(혹은 유천(柳川))을 아직까지도 '버드내(벌들내)라 부르고 있듯이 '대전천(大田川)'도 '한밭내'로 불렀을 것임에 틀림없다. '대전(大田)'을 아직도 '한밭'이라 부르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생각하여도 그렇다.
비록 표기지명(表記地名)으로는 '대전(大田)'이라 적었으되 실제적인 호칭은 '한밭'이라 하였던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이 바로 '대전천(大田川) 일운(一云) 관전천(官田川)'이다. 이 '관전천(官田川)'을 '관밭내'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를 한둘 들어보자. '한밭'(대전(大田))이라 불리는 지명이 전국에 보편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바 다른 곳에 있는 '한밭'은 아직도 하나의 마을로 남아 있을 뿐이다. 가령 청풍군(淸豊郡) 원남면(遠南面)의 '한밭(대전(大田))과 단양군(丹陽郡) 어상천면(漁上川面)의 '한밭'(대전(大田))은 하나의 마을로 거기에 '큰밭'이 있었기 때문에 '한밭, 한밭들, 대전(大田)'이라 불렀는데 1914년에 '대전리(大田里)'가 되었다. 또한 구충주군(舊忠州郡) 동양리(東良面)의 지역에도 '큰밭'이 있으므로 '한밭, 대전(大田, 황전(黃田)'이라 불렀는데 1914년에 역시 '대전리(大田里)'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밭'을 황전(黃田)'으로 표기하고 그것을 '황밭'이라 부른 예(例)와 '한밭'을 '관전(官田)'(관밭)이 당시에 구어(口語)로는 '한밭'이라 불렀던 사실을 증언(證言)하는 바라 하겠다.
(3) 가장 보편적으로 호칭된 지명 '한밭'(대전(大田))
이른바 시장명(市長名)은 가장 보편적으로 부르는 지명(地名)이다. 매 5일마다 서는 '닷새장'의 이름 그것은 가장 널리 그리고 일반적으로 불리는 토착지명(土着地名)이다. 이 시장(市長)의 이름이 '대전장(大田場)'(한밭장) '대전시(大田市)'(한밭저자)이었던 것이니 이 고장의 전통지명적(傳統地名的)인 한자(漢字) '대전(大田(한밭))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비롯한 여러 선비들이 지은 '이 고장 찬가'의 제목이 '대전팔경(大田八景)', 혹은 '대전팔경가(大田八景歌)'이었다. 그 중에도 특히 지명학(地名學)의 대가(大家)였던 지헌영(池憲英) 선생의 '아! 대전(大田)아'는 이 고장을 찬양한 현대시이다. 그는 여러 세대를 발암리(鉢岩里(지금의 선화동))에서 거주한 대전(大田) 토박이의 후손으로 그의 논문과 작품에서 오직 대전(大田)만을 발견할 뿐이다. 그리고 한 고장의 전통지명(傳統地名)이 무엇인가를 자연스럽게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우리는 택호(宅號)를 참고할 수 있다. 가령 '숲말(임리(林里))택(宅)'이란 말은 들었어도, '태전택(太田宅)'이란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지금까지 어휘사적(語彙史的)인 면(面)에서 살펴본 결과로도 이 고장의 전통적인 고유지명은 '한밭'이며 그 한자지명은 '대전(大田)'임에 틀림없다.
4. '태전(太田)'의 발생이유(發生理由)
우리는 '태전(太田)'이 발생한 원인(原因)을 두 측면에서 우선 가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첫째 가설 : '대전(大田)'의 오기(誤記)일 가능성
지명(地名)을 기록(記錄)하는 과정에서 점하나를 더 찍거나 안 찍거나 혹은 덜 찍으므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오기(誤記)의 결과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실례를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이조실록(李朝實錄)에서 들어본다.
① 사비(泗 ) → ② 사자(泗  :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③ 비풍(比豊) → ④ 북풍(北豊(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소비포(所比浦) → 소북포(所北浦(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삼국사기 ①)
(삼국유사 ②)
(삼국사기 ③)
(세종실록 지리지 ④)
의 경우처럼 '대(大)'자(字)에 점하나를 더 찍으면 '견(犬)' 혹은 '태(太)'의 오기(誤記)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위의 옛 문헌의 예와 같이 부주의로 점 하나를 더 찍으므로써 발생한 '대(大)→태(太)'의 오기(誤記)인가 아니면 반대로 덜 찍으므로써 발생한 '태(太)→대(大)'의 오기(誤記)인가?
만일 1904년까지 '태전(太田)'으로 전해오다가 갑자기 '태전(大田)'이 나타났다면 '태(太)→대(大 : 大田)→(大田)의 오기(誤記)를 주장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1904년까지 '대전(大田)'이 전통적으로 상용되었고 또한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중에 갑자기 '태전(太田)'이 나타났기 때문에 '대전(大田)→태전(太田)'의 오기(誤記)로 봄이 타당한 것이다.
(2) 둘째 가설 : 일본식(日本式) 표기형(表記形)일 가능성
일인(日人)들은 '대(大)'와 '태(太)' [タイ]로 동일하게 발음하다. 따라서 일인(日人)들에게는 '대전(大田)'혹은 '태전(太田)'이 둘다 [タイテン]이기 때문에 어느 것으로 적어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관보(官報)에 '대전(大田)'과 '태전(太田)'이 혼기(混記)되어 있다. 비록 1910년 이후의 관보(官報)에는 '태전(太田)'이 나타나지 않지만 보다 후대에 간행(刊行)된 일인9日人) 등호계태(藤戶計太)의 최근조선지리(最近朝鮮地理)에서 동일한 '한밭'의 의미인 '대전(大田)'을
大田(定州郡) (平安北道)
大田(大田郡) (忠淸南道)
大田(潭陽郡) (全羅北道)
와 같이 혼기(混記)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1914년 개정(改定)한 내용에는 '대전(大田)'(담양군(潭陽郡))으로 표기되었다.
또한 삼성당편(三省堂篇(1914))의 「조선지도(朝鮮地圖)」에도 엄연히 '태전(太田)'으로 표기되어 있다(앞에서 제시한 내용 참고). 이 모두가 이른바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태전(太田)'을 '대전(大田)'으로 바꾸라고 명령한 것으로 오보(誤報)된 1909년 뒤에 혼기(混記)된 사실들이다.
앞의 두 가설 중에서 필자는 둘째 가설이 보다 더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보려 한다. 그 이유(理由)는 다음과 같다.
(가) 「태전(太田)」이 비롯된 시기가 을사망국조약(乙巳亡國條約)을 맺은 1905년의 바로 전해인 1904년이다. 이 시기(時期)는 벌써 국권(國權)이 거의 일인(日人)의 손에 넘어간 때이다. 따라서 일인(日人)들이 편의에 따라 일본식(日本式)으로 거리낌없이 적어도 무방한 혼란기였다는 점.
(나) 만일 전중시지조(田中市之助)가 대전발전지(大田發展志)에 기술(技術)한대로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태전(太田)'을 '대전(大田)으로 고치라고 명하였다면 그것은 오히려 혼기(混記) 상태에 빠져 있는 지명표기(地名表記)를 전통지명(傳統地名)인 '대전(大田)'으로 복원(復元)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결정적인 이유(理由)를 다음 (다)에서 제시한다.
(다) 서기(西紀) 1914년에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第11號에 의거하여 전국(全國)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을 개편(改編)할 때 그 당시까지 사용하던(고종(高宗) 32년에 확정된) 지명을 그대로 전승(傳承)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원칙에 따라서 고종(高宗) 32년(1895)의 대전리(大田里)가 '대전군(大田郡)'가 '대전면(大田面)'으로 승격된다. 여기서 전래지명(傳來地名)인 '대전(大田)'이 그대로 승계(承繼)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잇다.
(라) 경부선의 가설과 대전(大田)역이 설치된 이후부터 하나의 자연부락이었던 '한밭'(대전(大田))은 리(里)단위 행정지명으로 승격한(1895)때로부터 오래지 않아 급격히 도시화(都市化)한 다. 그리고 이처럼 새로 형성된 도시(都市)인 대전(大田)은 일인(日人)에 이하여 개척되고 발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초기의 대전(大田)발전과 일인(日人)의 밀접한 관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일인(日人)들이 이 곳을 적극적으로 지배하고 통치한 시기로부터 비로소 '태전(太田)'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태전(太田)'과 일인(日人)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마) 만일 잘못된 일부의 주장대로 '태전(太田)'을 일인(日人)의 어떤 목적 때문에 '대전(大田)'으로 바꾸었다면 왜 '태백산맥(太白山脈)'으로 개정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전국의 전통적인 한자지명(漢字地名)인 '공주(公州), 전주(全州), 광주(光州), 청주(淸州), 대구(大邱), 부산(釜山), 마산(馬山), 목포(木浦), 강릉(江陵), 수원(水原), 인천(仁川), 해주(海州), 평양(平壤)' 등 어느 한 곳도 바꾸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대전(大田)'만이 유일한 개정 대상이 되었던가? 그 맥을 자르기 위해서였다면 다른 곳은 자를 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개정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부의 잘못된 주장대로 오랜 동안 사용하여 온 전통지명이 '태전(太田)'이었는데 일인(日人) 이등박문이 그 발전의 맥을 단절하기 위하여 '대전(大田)'으로 바꾸었다면 서기 1945년의 광복과 동시에 왜색이 짙은 '대전(大田)'을 폐기하고 '태전(太田)'을 도로 찾는데 시민(市民)이 앞장섰을 것이다. 마치 '한양(漢陽)'·한성(漢城)'이라 부르던 수도명(首都名)을 일제(日帝)가 '경성(京城)'으로 바꾸어 불렀던 것으로 이해한 나머지 광복과 동시에 왜색지명인 '경성(京城)'을 버리고 '서울'을 택한 국민의 슬기처럼 만일 '한밭·대전(大田)'이 전통지명이 아니고 '태전(太田)'이 전통지명이었다면 '태전(太田)'이라 도로 부르기 운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저항없이 '한밭·대전(大田)'이 사용되었음은 곧 그것이 전통(傳統) 혹은 정통(正統))의 지명이었기 때문임을 증언하는 것이라 하겠다. 더욱이 항일투쟁으로 옥고까지 치른 지헌영(池憲英(1871))의 대전(大田)을 예찬한 시(詩)의 제목도 '아! 대전(大田)아'이며, 역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 때 옥고를 치룬 김형기(金炯基(1970))의 대전(大田)을 찬미한 시(詩)의 제목도 '태전팔경가(大田八景歌)'이다. 위 두 사람은 대전(大田)을 지켜 온 항일투사이다. 그런데 만일 '대전(大田)'이 왜인의 지명이었다면 제일 먼저 앞장 서서 본래의 지명을 찾는 운동을 벌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大田)'을 시(詩)의 제목으로 삼은 것을 보면 그것이 전통(정통) 한자 지명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된다.
(3) 지명의 개정 문제
만일 우리 고장의 옛 이름을 찾아서 바꾸어야 한다면 그것은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고유지명인 '한밭'이다. 한자 지명인 '대전(大田)'은 고유 지명인 '한밭'을 한자(漢字)로 옮겨 표기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고유성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공식명이나 행정지명으로 공용되고 있진 않지만 아직도 이면에서는 '한밭식당, 한밭고등학교, 한밭중학교' 등과 같이 쓰이고 있으니 고유지명 '한밭'으로 되돌아가도 지명사적인 면에서나 어휘사적인 면에서 볼 때 지극히 자연스런 회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한자지명(漢字地名)으로 고유지명인 '한밭'에서 파생한 '대전(大田)'이기는 하지만 역시 그것이 아마도 500년 이상(문헌에 나타나는 시기로부터 기산하여도)을 '한밭'과 공존하여 왔다. 근래에 와서는 '한밭'보다는 '대전(大田)'이 오히려 행정 지명으로 공식화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고유지명 '한밭'으로 바꾸려면 현실적으로 많은 애로가 뒤따를 것이다. 문패로부터 호적, 주민등록, 등기부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이 '대전(大田)'이 오히려 행정 지명으로 공식화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고유지명 '한밭'으로 바꾸려면 현실적으로 많은 애로가 뒤따를 것이다. 문패로부터 호적, 주민등록, 등기부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이 '대전(大田)'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만일 '대전(大田)'을 고유지명 '한밭'으로 바꿈이 마땅하다면 '공주(公州)'는 '곰나루∼곰골'로, '전주(全州)'는 '비사벌(比斯伐)'로, '청주(淸州)'는 '살매(薩買)'로, '대구(大邱)'는 '달구벌(達丘伐)'로, '경주(慶州)'는 '서라벌(徐羅伐)'로, '부여(夫餘)'는 '소부리(所夫里)'로, '광주(光州)'는 '무진주(無珍州)=무돌골'로, '강릉(江陵)'은 '아비라(阿琵羅)'로, '수원(水原)'은 '매홀(買忽)'로, '인천(仁川)'은 '미추홀(彌鄒忽)'로 바꾸는 거국적인 고유지명의 되찾기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와 같은 우리의 이상이 실현되려면 막대한 경제적 뒷받침과 인력 그리고 상당한 시일이 필요한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그것이 고유지명이든 한자 지명이든 오랫동안 사용하여 온 전통지명(傳統地名)은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이다. 연대(年代)가 올라갈수록 문화재(文化財)의 값어치는 상승한다. 지명(地名)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문화재(文化財)는 장구(長久)한 세월에 걸쳐 전해져 오면서 누대(累代)로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며 정성껏 간수(看守)한 조상들의 얼이 깃들어 있기에 그것은 훼손됨이 없이 고이 간직하고 길이 보호하여야 할 지존(至尊)한 존재인 것처럼 고지명(故地名) 역시 오랫동안 민족의 입에 회자(膾炙)되어 왔기에 그 속에는 민족혼(民族魂)이 대대(代代)로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인(公認)할만한 특별한 사유(事由)가 없는 한(限) 정통지명(正統地名)은 물려 받은대로 보존(保存)하여 길이 후손(後孫)에게 물려 주어야 할 막중(莫重)한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라 하겠다.
4. 마무리
지명(地名)은 소지명(小地名)으로부터 대지명(大地名)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독특한 뜻을 지니고 존재한다. 그런데 지명의 대소(大小)관계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어떤 지명은 보다 작은 단위(單位)로 격하(格下)되기도 하고, 어떤 지명은 보다 큰 단위로 승격(昇格)되기도 한다. 고려 태조 23년(서기 940년)에 비풍군(比豊郡)이 회덕군(懷德郡)으로 변경된 이래로 군단위였던 이 지명은 군(郡)>현(縣)>면(面)>리(里)·동(洞)과 같이 그 지칭범위가 점점 축소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무명(無名)의 소지명(小地名)이었던 '대전(大田)'은 최근에 와서야 리>면>군>부>시>직할시와 같이 대도시의 유명한 지명으로 급격히 부상하게 되었다. 이렇듯 하루가 다르게 번영하여가는 희망찬 '한밭'이 '대전(大田)'이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 고장의 전통지명인 '한밭'과 '대전(大田)'의 어원과 어의를 파악하고 나아가서 그 정통성을 재확인하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이 고장의 한자지명(漢字地名)인 '대전(大田)'이 기록으로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서기 1530))이다. 이 문헌에 현재의 '대전(大田)'이 '대전천(大田川)'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 책의 원본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1486))이니 '대전(大田)'은 오히려 40여년이 나 더 앞선 시기에 나타난 사실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숙종 15년(1689)의 「초산일기」에 '대전(大田)'이 나타나며, 영조 27년(1751)의 「충주박씨별급문서(忠州博氏別給文書)」에도 '대전(大田)'이 나타난다. 그 뒤의 영조때(1757∼1765)에 간행된 「여지도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대전(大田)'은 공주목(公州牧) 산내면(山內面)의 지역에 있었던 마을이었을 것인데 목척리(木尺里)만 나타나고 대전리(大田里)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의 대전(大田)은 아직 리(里)·동(洞)단위의 행정지명에도 못미치는 소지명이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기록년으로부터 270여년 두에 저술된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1863)」에 '대전천(大田川) 일운관전천(一云官田川)'이라 적혀 있고,호서읍지(湖西邑誌(1871))의 공주목조(公州牧條)에 2일과 7일에 서는 시장명(市長名)으로 대전시(大田市)가 나타난다. 이때까지는 아직도 '대전(大田)'은 리동단위(里洞單位)의 행정지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장명(市長名)이나 천명(川名)으로만 겨우 나타날 뿐이다.
고종 32년(1895)에 단행된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대전(大田)'은 비로소 회덕군 산내면의 '대전리(大田里)'란 리(里)단위 행정지명으로 등장한다. 그 뒤로 '대전(大田)'은 1901년 경부선 의 대전역(大田驛)을 설치함에 따라 급격히 발전되어 1914년 일제의 군면폐합에 의하여 대전군(大田郡)이 설치되고 대전리(大田里)는 대전면(大田面)이 되었다. 이후로 1931년에 대전읍(大田邑)으로 격상하였고, 1932년 공주에서 도청이 이전된 뒤인 1935년에 대전부(大田府)로 승격되었다.
여기까지에서 우리는 이 고장의 한자지명(漢字地名)의 전통명이 '대전(大田)'이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을사망국조약을 맺은 1905년부터 관보에 느닷없이 '태전(太田)'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후에 관보(1906∼1909 사이)에도 여러번 '태전(太田)'이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한편 관보(1908)의 부록에는 '태전(太田)'과 '대전(大田)'이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도대체 이 '태전(太田)'의 정체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는 다음에서 요약 규명하기로 하고, 우선 일차적으로 내릴 수 잇는 결론은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그 정통명이 '대전(大田)'일뿐 결코 '태전(太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태전(太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태전(太田)'이 '대전(大田)'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아주 후대(1904)에 대전이란 전통명 곁에 '태전(太田)'이 잠시(7년동안) 관보란 문서에 제한적으로 나타났을 뿐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고유 지명과 한자 지명을 아울러 사용하고 잇다.
'한밭'과 '대전(大田)', '곰나루'와 '웅진(熊津)', '한절골'과 '대사동(大寺洞)' 등이 바로 그 좋은 예들이다. 그런데 이처럼 한 고장에 대한 두 지명이 존재할 경우에는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 먼저 발생하였고, 이 고유 지명을 한자(漢字)로 표기한 것들이 이른바 한자지명(漢字地名)이다. 따라서 '한밭'이 '대전(大田)'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발생한 우리 고장의 고유 지명이라 하겠다. 그러면 발생 당시의 '한밭'은 '대전(大田)'의 어느 곳이었던가? 앞에서 소개한 문헌들의 설명에 의거하면서 '대전천(大田川)'의 상하류역을 제외한 중앙부의 양천변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인동, 원동, 정동, 중동, 대흥동, 은행동 일원인 한밭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한밭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곳의 지명을 우리 조상들은 '한밭'이라 불렀던 것인데 이 고유지명을 표기할 때에 우리의 고유한 문자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한자(漢字)를 차용하여 적었다. 그러면 '한밭'을 어떤 한자(漢字)로 표기하여 왔던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한'에 대한 대응기록을 찾아 보면 신라의 관직명인 「한내마(限奈麻) : 대내리(大奈麻), 한사(韓舍) : 대사(大舍)」를 비롯하여 지명표기에서도 「한내 : 대천(大川), 한골 : 대동(大洞), 한머리 : 대두리(大頭里), 한뿔이 : 대각리(大角里), 한다리내 : 대교리(大橋里), 한뫼 : 대산리(大山里), 한티골 : 대치동(大峙洞), ㅎ한재 : 대치(大峙), 한밤이 : 대율리(大栗里), 한절골 : 대사동(大寺洞)」등과 같이 오로지 '대(大)'자로만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밭'에 대한 대응 표기를 찾아보면 「삼밭 : 마전(麻田), 대밭 : 죽전(竹田), 삼밭개 : 삼전도(三田渡), 진밭들 : 장전리(長田里), 꽃밭들 : 화전리(花田里), 갈밭 : 갈전(葛田)」등 모두가 한결같이 '전(田)'자로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주 동량면의 '한밭', 청풍 원남면의 '한밭', 평북 정주의 '한밭' 등 전국에 수 없이 분포하고 있는 모든 '한밭'이 '대전(大田)'으로만 표기되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한자 지명의 전통 표기법도 오로지 대전(大田)만을 허용하기 때문에 「태전(太田)'을 '대전(大田)'으로 바꾸었다 함」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 하겠다.
그러면 서기 1904년부터 1909년까지의 관보에 나타나는 '태전(太田)'의 정체는 무엇인가? 앞에서 우리가 확인한 바와 같이 우리의 전통적인 한자 표기는 '대전(大田)'이었기 때문에 '태전(太田)'은 오히려 일본식 표기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일인(日人)들의 발음으로는 '대(大)'와 '태(太)'가 동일음인 「タイ」인 것이다. 말하자면 '대전(大田)'과 '태전(太田)'이 동일한 발음인 고로 그네들은 어느 것으로 적어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관보에 '대전(大田)'과 '태전(太田)'이 혼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등호계태의 저서인 「최신조선지리지」에서도 담양군의 대전면(大田面)을 태전면(太田面)으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 고장 '태전(大田)'은 태전(太田)'으로 적지 않고 '대전(大田)'으로 적었다. 그런가 하면 '태백산(太白山)'을 '대백산(大白山)'과 '태백산(太白山)'으로 혼기하고 있다. 이처럼 태전(太田)은 일인들의 발음으로 '대전(大田)'과 동일하였기 때문에 임으로 혼용 표기한 아주 단명한(7년간) 표기지명일 뿐이다.
실로 우리 조상들이 남긴 지명개정법은 현명하였다. 행정구역의 변경에 따라 두 지역을 통폐합할 경우에는 반드시 두 지역의 지명에서 한 자씩을 따다가 새로운 지명을 삼았다. 이와 같이 양쪽 지명의 일부를 따다가 새지명 만드는 법을 日人들이 그대로 습용하여 개정한 새지명이 '대전군+회덕군→대덕군, 대면+덕면→대덕면(담양군), 대치면+갈전면→대전면(댬양군)' 등이다. 이처럼 통폐합의 경우에 한하여 전래지명의 개정이 허용되는 것인데 그것도 전통지명의 명맥을 이어주는 범위 안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또한 행정지명이 개정될 때는 반드시 공식적인 기록을 남기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 고장의 전통명인 '한밭'만이 시종일관하여 사용되어 왔고, 한자지명으로는 '대전(大田)'만이 「대전리(大田里), 대전면(大田面), 대전군(大田郡), 대전부(大田府), 대전시(大田市), 대전직할시(大田直轄市)」와 같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어 왔을 뿐이다. 우리가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공식적인 기록인 「고종실록」의 서기 1894년(갑오(甲午))조와 서기 1899년조에 나타나는 '대전(大田)'이 이 고장의 정통 한자지명(漢字地名)임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고장의 정통지명은 오로지 '한밭'과 '대전(大田)'일 뿐임을 재삼 강조하여 마땅하다.
제4절 대전직할시 연혁
현재의 대전지방은 역사상 행정구역의 변천이 여러 번 있었지만, 대체로 백제(百濟) 때에는 우술군(雨述郡), 신라(新羅) 때에는 비풍군(比豊郡), 고려(高麗) 때에는 회덕군(懷德郡)·유성현(儒城縣)·덕진현(德津縣)·진잠현(鎭岑縣)의 지역이다.
우리나라 지방행정 제도의 실질적인 확립(確立)은 조선 태종(太宗)때부터인데, 태종(太宗) 13년(1413)에 전국을 8도로 정할 때 대전지역(大田地域)은 공주목(公州牧) 관할하(管轄下)의 회덕현(懷德縣)·진잠현(鎭岑縣)에 속했었다. 이러한 체제는 조선 말엽까지 큰 변동 없이 계속되어 오다가 고종 32년(1895) 지방행정 제도의 개편으로 회덕군(懷德郡)·진잠군(鎭岑郡)의 지역이 되었다.
그후 1910년 한·일 합방(韓·日合邦)이 되고 식민정책이 시작되면서 1914년 3월 1일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우리나라 최대의 지방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는데, 그때 회덕군(懷德郡), 진잠군(鎭岑郡)과 공주군(公州郡)의 일부를 합쳐서 대전군(大田郡)이 신설되었다. 대전군(大田郡) 밑에는 종래의 회덕군(懷德郡) 외남면(外南面) 지역(현 仁洞, 元洞, 中洞, 貞洞, 三省洞)을 중심으로 대전면(大田面)을 설정하고 회덕읍지(懷德邑誌)에 있던 군청을 현재의 원동(元洞)으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대전(大田)이 지방행정 구역의 명칭으로 등장한 것은 1914년의 일이었고, 이 때부터 설치된 대전군(大田郡) 대전(大田面) 지역이 현 대전시(大田市)의 모체(母體)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