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지리환경
조선시대 대전지역은...
회덕현은 현재 동구와 대덕구, 중구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된다.
치소는 산성이 있는 계족산을 진산으로해서 자리잡았는데 현재 그 터만 남아 있다.
조선후기 지방지도에는 당시 관아배치도가 상세히 남아 있다.
진잠현은 현재 대전의 서남부 서구 지역에 해당되는데 진잠초교와 그 일대가 그 중심 치소에 해당된다. 현재 관아 건물의 일부로 생각되는 기성관(杞城館)이 남아 있다.
예전부터 대전은 다른 지역에 비해 교통의 편리가 있었다. 회덕을 통해서는 문의나 옥천 방향, 진잠을 통해서는 연산이나 진산 방향으로 갈 수 있었고, 또한 이와 함께 사람들의 왕래의 편의와 숙식을 위해서 고려말이래 많은 역원(驛院)이 있었다.
회덕현내에는 정민역(貞民驛), 미륵원(彌勒院), 덕창원(德昌院), 총술원(寵述院) 등이 있었다. 이 중 미륵원은 굴파원(屈坡院)이라고도 하는데, 고려말이래 역원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 원(院)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걸쳐 이 지방에 살던 회덕황씨가에서 운영하던 곳으로 여행객에게 숙식과 휴식처를 제공하였다.
이 곳에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기문(記文)과 하륜(河崙)의 서(序)를 비롯해서 제현(諸賢)의 많은 시가 전해온다.
이같은 대전지역의 회덕현과 진잠현은 고종(高宗) 32년(1895)에 각각 회덕군(懷德郡)과 진잠군(鎭岑郡)으로 개명이 있었고, 그 뒤 여러 차례 군의 통합과정을 거쳐 1989년에 오늘날과 같은 대전의 영역이 형성되었다.
인문환경
예로부터 대전지방은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살기가 좋아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에도 영원히 대를 이어가며 살만한 곳이라 하였다. 이같은 좋은 경관을 두고 많은 문인 학자들이 유성팔경, 갑천팔경, 삼매당팔경 등을 애송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대전지방은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공주목 유성현, 덕진현이었던 지역과 회덕현, 진잠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회덕현에는 토성(土姓)으로 황(黃)·임(任)·이(李)·방(房)·방(方)·박(朴)·정(鄭)씨가, 진잠현에는 김(金)·이(李)·전(田)씨 등이 있었고, 인구는 18세기 중반 무렵 2만 5천명 정도 였다.
18세기 회덕현 각 면별 인구과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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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진잠현 각 면별 인구와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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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 생산물로는 임산물과 약재류 등이 주류를 이루었고, 성북동과 보문산 구완동 일대에서 생산한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도자기가 있었다.
선사시대에는 조선시대에 이르는 많은 유적과 유물의 존재는 대전지방이 사람이 살기좋은 인문지리적환경을 갖춘 곳임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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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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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기관
대전지방
향교 및 서원 사우 분포도
- 1. 회덕향교
- 2. 진잠향교
- 3. 숭현서원
- 4. 도산서원
- 5. 미호서원
- 6. 종회사, 정절사, 남간사
- 7. 상곡사
- 8. 용호사
- 9. 동로사
- 10. 창계숭절사
- 11. 문충사
- 12. 돈파사
- 13. 집성사
조선시대 교육기관은 관학(官學)과 사학(私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관학에는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과 중등교육기관으로 서울에는
사학(四學), 지방에는 향교(鄕校)가 있다.
사학에는 초등교육기관인 서당(書堂), 중등교육기관인 서원(書院)이 있었는데,
이들 교육기관의 주요한 기능은 선현(先賢)에 대한 제사와 교육이었다.
제사로는 봄·가을로 행하는 석전제(釋奠祭)와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삭망제(朔望祭)가 있었다.
대전지역에도 관학과 사학이 갖추어져 있었다.
관학은 회덕향교(懷德鄕校)와 진잠향교(鎭岑鄕校)가, 사학은 서당의 성격을 가지는 비래암(飛來庵)이나 옥류각(玉溜閣), 사교루(四敎樓) 등과 숭현서원(崇賢書院)이
있었다.
특히 숭현서원은 대전지역에서 제일 먼저 건립된 서원이고, 호서사림(湖西士林)의 학문적 구심 역할을 해온 서원이다.
최근 대전광역시에서는 고종(高宗) 때 훼철된 숭현서원지를 발굴 · 복원했는데, 숭현서원 관련자료는 대전지역 서원의 역사와 유학사 및 호서사림들의 활동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다.
한편 서원과 향교에서 주요한 일이 있으면 통문(通文)을 발송 하였는데, 통문 발송의 대상은 유사기관이나 혹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사적 사실이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자료를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803년 2월 28일 화재를 입은 숭현서원을 중수하기 위해 여러 선비가 발의(發議)해 통문을 한 일이 있는데, 이는 당시 숭현서원의 역사와 서원을 중심으로한 유림(儒林)의 활동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유교문화와 호서사림
대전지역은 조선후기 호서사림(湖西士林)의 중심지역이다.
일찍부터 충절에 빛나는 사육신 중의 한사람인 취금헌 박팽년의 유허지와 기묘명현 중 한 사람인 충암 김정을 비롯하여 문익공 정광필, 규암 송인수 형제, 추파 송기수, 병자호란에서 순절한 죽창 이사직, 야은 송시영 등의 자취가 있어 유교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대전이 한국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17세기이후 조선 정치와 사상을 주도하는 학파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전지방의 유학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기호사림의 학통을 이어 받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문하에서 수학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과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1672), 또한 잠야 박지계(潛冶 朴知誡)에게 사사한 탄옹 권시(炭翁 權諰, 1604~1672)에 의해 주도되었다.
조선후기 이들의 문하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이른바 호서사림(湖西士林)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우암 송시열은 주자의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계 김장생의 학풍을 집대성하고, 예학(禮學)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러한 우암의 학문과 사상은 구한말의 위정척사 및 항일의병 활동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제월당 송규렴(霽月堂 宋奎濂) · 옥오재 송상기(玉吾齋 宋相琦), 늑천 송명흠(櫟泉 宋明欽), 유회당 권이진(有懷堂 權以鎭) 등의 많은 명현이 배출되었고, 이들을 배향한 숭현서원(崇賢書院)을 비롯한 도산서원(道山書院), 미호서원(渼湖書院), 종회사(宗晦祠), 정절사(靖節祠), 용호사(龍湖祠), 집성사(集成祠), 돈파사(遯坡祠) 등의 많은 서원(書院)과 사우(祠宇)가 세워지게 되었다.
한편, 유적으로는, 쌍청당(雙淸堂), 송애당(松崖堂), 사우당(四友堂), 송준길 고택을 비롯하여 동춘당(同春堂)과 비래암(飛來庵), 옥류각(玉溜閣), 송시열고택과 남간정사(南澗精舍), 기국정(杞菊亭), 송자대전장판고(宋子大全藏板庫), 삼매당(三梅堂), 봉소루(鳳巢樓), 사교루(四敎樓), 취백정(翠白亭), 제월당(霽月堂), 옥오재(玉吾齋), 늑천정사지(櫟泉精舍址)등 많은 강학처와 누정(樓亭) 등의 유적이 남아 있고, 충효열(忠孝烈)에 빛나는 많은 정려(旌閭)와 명현의 묘, 비석들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대전지방은 한국유학사에 있어서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은 호서지역 유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산서원
1693년 만회 권득기(1570 ~1622)·탄옹 권시(1604~1672)를 배향한 서원으로 고종대 훼철된 후 다시 복원되었다.
김정별묘
기묘명현의 한사람인 충암 김정(1486~1520)의 묘소아래 별묘와 신도비가 있다.
박팽년유허 전경
동구 가양동에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1417~1456) 의 유허지가 있고 유허비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송애당 전경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과 교유했고 병자호란때 척화를 주장했던 송애 김경여(1596~1653)가 지었다.
송시열 간찰
1670년 12월28일. 송시열이 친척인 평창군수 송국구(宋國龜)에게 보낸 편지.
죽창실기
병자호란시 강황도에서 순절한 죽창 이시직(1572~1637)의 관련 기록 모음집.
늑천유고
늑천 송명흠(1705~1768)의 문집
서포 김만중 간찰
1676년 정월6일, 서포 김만중(1637~1692)이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위로하는 편지에 답장으로 보낸 편지.
금암집 판목
지봉 이수광이 극찬했던 금암 송몽인(1582~1612)의 시문을 모은 문집 판목. 죽창이시직이 쓰고 비래암 스님 지숭이 새겼다.
용운문연
늑천 송명흠이 사용하던 것으로 전하는 용무늬가 있는 단계석 벼루.
구한말의 대전지방
연재 송병선 영정
구한말(舊韓末)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면 대전지방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 경부선이 통과하는 대전역을 중심으로 한 신시가지가 형성됨으로써 구시가지의 문화적, 지역적, 경제적 토대를 무시하고 전통문화를 단절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 당시 만들어진 지도로 보아도 대전역 중심으로한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대전지방에는 아직도 유교문화가 건재했고 유림 활동도 활발했다. 구한말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 심석재 송병순(心石齋 宋秉珣)을 비롯해 난곡 송병화(蘭谷 宋炳華) 등이 호서사림을 대표하면서 성리학의 맥을 잇고 있었고, 신응조(申應朝), 송도순(宋道淳) 등은 한말 의병장이던 문석봉(文錫鳳)을 도와 유성에서 한말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대전지역의 역사적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또한 일제에 항거 음독 순절한 송병선 · 송병순을 비롯해, 역사가이면서 언론인으로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등 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가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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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곡 송병화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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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부내정경계도
1940년 대전역을 중심으로한 대전의 시가지 형성과정을 잘 보여주는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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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외필설
노사 기정진의 외필에 대해
변론한 심석재 송병준(1839~1912)의 변외필설
초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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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생가지
출토 자기편
중구 어남동 단재 신채호 (1880~1936)의 생가지에서 발굴된 자기편.
향촌사회의 민속문화
대전지방 향촌사회(鄕村社會)의
민속문화는 주로 농경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다.
농경생활과 관련된 민속놀이에 있어서도 두레 관련 농악놀이, 추수감사의 성격을 가지는 시월 산신제,
마을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하는 정월대보름 관련 놀이와 거리제 등으로 볼 때 전형적인 농경문화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 민속문화에 대해 생산풍속과 공동협력체계, 마을신앙으로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생산풍속과 공동협력체계는 향촌사회의 생활공동체에 기반을 두면서 상호부조 및 공동체의 유대가 목적이었다. 그러한 민속으로 동중계[대동계, 만동계, 동네계, 동계, 산제계]·송계[산림계]·두레·고지와 품앗이를 들 수 있다.
동중계는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 결정하는 마을회의 체계이며, 아울러 두레는 김매기 공동 노동조직으로서 대전시 전지역에서 조사 보고되었다.
두레는 농요·두레싸움·두레놀이로 연결되어 민속놀이로 승화 발전되어, 서구 도안동 농요·도안동 가락리
두레 농악놀이·서구 우명동두레 농악놀이·목상동 들말두레 놀이 등이 유명하다.
마을신앙은 당제(堂祭) 형식의 의례, 즉 유교식 제례의 마을 공동의례가 보편적이다.
상당신의 산신당, 하당신의 장승·솟대·탑·선돌·둥구나무[신목(神木)] 등이 모두 보이는 까닭에, 유교식
제례를 기초로 치루어지는 산신제와 거리제, 그리고 마을신앙의 대상물이 모두 존재한다.
상·하당신에 대한 제의(祭儀)는 대개 음력 정월 14일 밤에 이루어진다. 상·하당신의 제의 명칭은 산신제
[혹은 산제]와 거리제, 산신제와 장승제, 산신제와 탑제 등으로 나타났고, 하당신만 모실 때는 일방적으로 거리제[혹은 장승제·탑제]라고 부른다.
이같은 제의 역시 마을 단위의 동중계가 조직되어 마을 주민 대다수가 참여하여 공동으로 치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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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 산디마을 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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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다리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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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동 칠석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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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촌동 지경다지기 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