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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절사는 앞에 유등천(柳等川)이 흐르고 뒤에 멀찌감치 병풍처럼 겹쳐져 있는 산줄기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 천명(川名)은 또한 창계(滄溪)라 불리워서 이 사명(祠名) 역시 창계숭절사라고도 한다.향사인(享祀人)은 사육신(死六臣)의 일인인 취금헌 박팽년(翠琴軒 朴彭年)과 그의 동지였던 박심문(朴審問, 1408∼1456) 두 분이다. 박심문의 자는 신숙(愼叔)이요, 호는 청재(淸齋),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그의 부(父)는 세종 때 집현전 학사와 부제학을 지낸 박강생(朴剛生)이며 조(祖)는 조선 개국 때 이군불사(二君不事)의 두문동(杜門洞) 72현 가운데 한 분인 박침(朴 )이다. 박심문은 23세 때인 세종 13년(1431) 문과에 급제하여 사로(仕路)에 올라 육진(六鎭) 개척 때는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를 따라 큰 공을 세웠으며 예조정랑(禮曹正郞)로 있다가 세조가 즉위하자 사육신과 뜻을 같이 하여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 그러다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의주(義州)에 이르러 육신(六臣)의 처형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하여 "내가 육신으로 더불어 죽기를 맹약하였는데 내 어찌 차마 혼자만 살 수 있으리오"하며 음독 순절하였으니 바로 사육신과 더불어 의(義)를 하나 같이 하였다. 그후 그의 이러한 행적은 세상에 묻혀졌다가 순조 때 비로소 조정에 알려져 동왕 4년(1804) 그에게 왕이 직접 "정충고절불하육신(貞忠苦善節不下六臣[貞忠과 苦節은 六臣에 못지 않다])" 여덟 글자를 써서 내리었고 아울러 이조참판(吏曹參判)[그 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하였다. 시호는 고종 8년(1871) 충정(忠貞)으로 정해졌다. 이에 사육신에 그를 함께 해 사칠신(四七臣)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칠신입사(七臣立祠)가 관향(貫鄕)과 구거지(舊居址), 묘하(墓下)에 있었는데 유독 그가 처음 터 잡은 이래 그의 후손들이 몰려사는 이곳 안영동만이 빠졌으므로 후예인 사인(士人) 박연황(朴淵璜)이 널리 사림의 공의(公議)를 모아 1923년에 숭절사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숭절사 사당 밑에는 강당인 상의당(尙義堂,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 16평)도 같이 마련하였다. 그후 두 건물이 퇴락되어 1977∼1978년 양년에 걸쳐 중수하였다.〈숭절사기(崇節祠記)〉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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