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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명 황인식(黃仁植)
생몰년대 1889∼1965
출생지 충남 공주 계룡면 상왕리
출처
조회 4840 작성일 2003-10-23
첨부
상세정보 교육자, 행정가. 1889년 12월 23일 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군(公州郡) 계룡면(鷄龍面) 상왕리(上旺里)에서 출생하였다.1) 그는 1909년에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원래 공주 영명학교는 기독교 선교사에 의하여 1905년에 설립된 학교로서 이 지역의 교육 발전을 위하여 이바지한 바가 배우 컸다. 그는 이 공주 영명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평양에 있던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수학(修學)하였으며. 1912년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면서 그해 6월에는 자신이 제1회로 졸업한 바 있는 모교(母校)인 영명학교의 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7월에 그는 상해(上海)를 다녀온 바 있는데, 이 때 그는 인천 수산 경찰로부터 요시찰 인물이라 하여 감시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1919년 3월에는 일본의 동경(東京)을 시찰하던 중 급거 귀국하여 독립가족을 돕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공주 영명학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감시를 받기도 하였던 그는 1921년에 이르러서는 영명학교의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 덴버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며, 1925년 6월에 이 대학을 졸업하였다. 또한 그는 이듬해 12월에는 콜롬비아 사범대학을 졸업하기도 하였다. 그는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26년에 귀국하여서는 다시 공주 영명학교에 복직하여 이세 교육(二世 敎育)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29년 11월에는 광주(光州) 학생운동(學生運動) 사건과 연루되어 수감된 바 있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반일(反日) 투쟁의 학생 운동이 일어난 이후에 이와 관련하여 공주 영명학교의전 학생들이 동맹휴학(同盟休學)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그 날로 즉시 영명학교의 교직원과 학생 다수를 구금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그는 평소에도 일본의 경찰들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낙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동맹 휴학이 시작된 당일에 곧바로 구금되었다. 그가 구금되어 있던 동안은 예년에 없던 혹한(酷寒)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는 무척 많은 고생을 했을 뿐만 아니라 건강도 몹시 허약해졌다 한다. 그 후 그는 수개월이 지나 검사로부터 엄중한 훈계를 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불기소 방면이 된 후에도, 그는 교육자가 감옥에 구금되었다는 것만 해도 죄가 된다는 이유로 하여 2년 동안 교원인가를 취소 당하는 불이익을 당한 바 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생계유지는 물론이거니와 자녀의 교육에도 상당한 지장을 받는 등 많은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의 동맹 휴학 사건으로 인하여 한 동안 많은 고통을 당했던 그는 1937년 7월에 안신영(安信永) 창가(唱歌)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일본 경찰에 의하여 평양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는 여기서 수일 동안 심문을 당하는 등 많은 고통을 겪었으며. 한여름의 삼복(三伏)더위로 어려움을 겪은 후에 석방되었다. 이 안신영 창가 사건은 당시에 평양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안신영(安信永)이 음악 시간에 학생들에게 불온한 창가(唱歌)를 가르쳤다 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평양 경찰서에 금되었던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그가 연루되었다고 하여 역시 평양 경찰서에 한동안 구금되어 있었으며, 후에 안신영은 기소처분으로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그는 석방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1940년에는 영명 실수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여 이 지역의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기도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태평양전쟁이 진행 중이던 1941년 12월에는 다시 일제(日帝)에 의해 수감되었으며, 이듬해에 석방된 바 있다. 이렇듯 영명학교의 교사와 영명 실수 학교의 교장으로 이 지역 교육과 학교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던 그는 일제(日帝)에 의해 수 차례 구금, 수감되어 많은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1945년 8월 해방 직후에는 미군정(美軍政)의 초청으로 중앙 정부 최고 고문격으로 내각에 참여하기도하였다. 1945년 해방 직후에 그는 1906년에 공주(公州)에 선교사로 부임하여 이 지역의 기독교와 교육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던 우리암(禹利岩, Frank E. Williams) 목사의 실자(實子)인 광복(光福, Zur Williams)으로부터 초청을 받게 되었다. 광복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군부 요직을 맡아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그는 광복의 알선으로 당시 미군정(美軍政) 장관(長官)이었던 아놀드(Anold) 대장(大將)의 고문으로 내각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중앙청에서 군정(軍政)의 내각을 조직할 때 한인(韓人)의 고위 각료 인사에는 그를 통하여 물색하게 되었으며, 이 일로 그는 당시의 거물급 인사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약 2개월 동안 중앙 정부 최고 고문으로 근무하였으며, 11월경에는 군정하(軍政下)의 지방장관에 임명되어 충청남도(忠淸南道) 도지사대리(道知事代理)로 부임하였던 것이다. 그는 당시가 일제(日帝)의 식민 정책에서 벗어난 직후의 과도기였기 때문에 특히 질서 유지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로 인하여 각 도(道)에서 충청남도 도정을 견학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 무렵 충청남도(忠淸南道) 고문회(顧問會)의 회장(會長)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고문회는 충청남도 도정(道政)에 협력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수시로 이 고문회를 개최하여 도정(道政)에 관한 의견을 진술하고 자문(諮問)에 응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충청남도 고문회의 회장은 당시 충청남도(忠淸南道) 지사대리(知事代理)인 황인식(黃仁植)이었으며, 부회장은 성원경(成元慶)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얼마 동안 충청남도 지사대리로서 도정(道政)의 발전에 공헌하였던 그는 1947년에 국립군산 해양대학의 초대 학장에 취임함으로써 다시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이 대학의 초대학장으로 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후에 1949년에는 폐쇄되었던 공주(公州) 영명남학교(永明男學校)를 복교시키고 이 학교의 교장(校長)에 취임한 바 있다. 원래 이 영명남학교는 1906년 미국 북감리회 소속이었던 우리암(禹利岩. Frank. E. C Williams)목사에 의해 설립된 학교이다. 이 학교는 이 지역의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초대 교장은 설립자인 우리암 목사였다. 그런데 이 영명 남학교는 1940년 일제(日帝)에 의하여 우리암 초대 교장이 강제로 추방되었으며, 1941년에는 일제에 의해 이 학교가 강제로 폐교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황인식(黃仁植)은 조병옥, 양재순 등과 함께 영명 남학교의 복교운동을 전개했으며, 그 결실로 이 영명 남학교는 1949년에 영명중고등학교(永明中高等學校)로 복교되었다. 그리고 황인식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는데, 그는 이 학교의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기도 했다.2) 이처럼 그는 영명학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이 학교의 발전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1957년 7월에는 거의 평생을 바친 교육계에서 정년 퇴임하였다. 그가 교육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공헌한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는 공주 시민단체가 주최가 되어 <황인식(黃仁植) 선생(先生) 교육공로비(敎育功勞碑)>를 제막하기도 하였다. 하늘을 그리워 구기지 않는 마음과 그 손길 어둠을 빛으로 가꾸어 봉오리마다 눈 뜨임 입고 보람찬 내일로 익어가는 가슴에 기리 젊어만 있을 당신의 아름다움이여. 위의 시(詩)는 <황인식 선생 교육공로비>에 적혀 있는 비문(碑文)으로, 공주사대(公州師大) 교수를 역임한 바 있는 시인(詩人) 이원구(李元九)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원구 교수의 유고시집(遺橋詩集)인<바람의 노래> (창학사 간(刊), 1980, p. 133)에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3) 그는 교직에서 정년 퇴임한 후에는 공주 노인회장(老人會長)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1965년 4월 12일에 79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이에 공주 영명학교에서는 일평생을 영명학교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학교장(學校葬)을 지냈다. 이 자리에서 공주 제일교회의 조창석 목사는 그가 가족과 목사가 보는 가운데 마치 자는 듯이 흠없고 깨끗한 모습으로 천국으로 가셨다 라고 설교한 바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실로 깨끗하고 성결하게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일평생을 교육자로서 그리고 종교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일제(日帝)에 의해 여러 차례 수감되어 심문을 당하면서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는 자신이 제1회로 졸업한 바 있는 모교(母校) 영명학교(永明學校)에 대하여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사로서 교장으로서 학교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폐쇄되었던 학교를 다시 복교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등 그가 교육자로서 남겨 놓은 이러한 혁혁한 업적은 영명학교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또한 그가 충청남도(忠淸南道) 지사대리(知事代理)로 부임하여 이 지역 도정(道政)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공로 역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 하겠다. 《자료 : 1) 이하(以下)의 내용은 공주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김진규(金鎭奎) 교수가 제공한 각종자료에 의거하여 기술하였음. 2) 김진규(金鎭奎), '개화기(開化期) 공주지방(公州地方)의 기독교 문화 서설(序說)'「웅진문화(熊津戈化)」 제오집(第五輯), 공주향토문화연구회(公州鄕土文化硏究會), 1992, pp. 64∼66 참조. 3) 공주 시민단체가 주최가 되어 건립한 이 <황인식 선생 교육공로비>는 현재 앵산 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다.》 《宋百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