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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명 황윤보(黃允寶)
생몰년대 충열왕말∼공민왕초
출생지
출처
조회 4324 작성일 2003-09-22
첨부
상세정보 고려말의 문신(文臣). 황락(黃洛)이 고려의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황(黃)이라는 득성(得姓)을 하여 그 후손(後孫)인 윤보(允寶)가 회덕(懷德)에 머물러 회천군(懷川君)에 봉(封)하였으므로 회덕황씨(懷德黃氏)의 시조(始祖)가 된다. 본래 황성(黃姓)은 평해(平海), 창원(昌原), 장수(長水), 회덕(懷德)이 모두 중조예부상서(中朝禮部尙書) 황락(黃洛)으로 초조(初祖)를 삼는다. 중세(中世)에 윤보(允寶)가 회천군(懷川君)에 봉해져 이로부터 회덕(懷德)을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회천군 황윤보유사(黃允寶遺事)에 의(依)하면 윤보(允寶)는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서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지문성부사(知文成府事)에 책록(冊錄)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부전서(戶部典書)에 전보(轉補)되었으니 대개 대몽은(大蒙恩)으로 받은 은전(恩典)의 벼슬이었다. 자세한 사적(事蹟)은 모두 고려사(高麗史)에 기재(記載)되어 있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충효심(忠孝心)이 있고 재예(才藝)는 문무(文武)를 겸전하여 젊어서부터 큰절개가 있었고 그가 조정에 있을 때는 그 언론(言論)과 풍채(風彩)며 추지(趣旨)가 족히 강론(講論)을 권장할만 하고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곤직(袞職)을 구비하여져서 시비(是非)를 판단한다든지, 국가안위(國家安危)에 의사(疑事)를 판정(判定)하는데 이르러서도 진심(眞心)으로 두려운 것이 없으매 아무리 꾸며서 효유한다 하더라도 그 지조(志操)를 뺐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깊은 재주와 지혜 그리고 넓은 학식(學識)이 있는 것을 사람들은 그 경륜(經綸)과 제세(濟世)하는 재목이 됨을 아는 이가 없었다. 다만 한 둘 동료(同僚)들 사이에서 국사(國事)를 보좌(補佐)하여 왕명(王命)을 받들어 임금의 교지(敎旨)와 임금에 올리는 봉서(封書)등을 출납(出納)하매 어진이를 추천하고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는 일을 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안정(安定)시키었고 또한 백성들을 가까이 하여 시대(時代)의 급선무(急先務)를 진달하였으니 그 본의(本意)는 수신(修身) 제가(齋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를 근본삼는 것보다 더 급선무(急先務)가 없다고 하였다. 이때는 불도(佛道)를 숭하던 시대여서 학자들이 다 불교(佛敎)를 따라서 실학(實學)을 저버리고 훈고(訓 )와 장구(章句)을 익혔기 때문에 자잘하고 전각(篆刻)이나 하는 무리들만 날로 번성하였다. 이 때 공(公)이 경전(經傳)을 밝히고 행동(行動)을 수양(修養)하는 논리(論理)로써 임금에게 고하여 학교(學校)를 널리 설치하고 교육을 시행하여 선왕(先王)의 뜻을 천명(闡明)해야 하는 것을 여러차례 고해 마지아니하는데 하루는 임금께서 법화경(法華經)을 송독(誦讀)하는 것을 듣고 문득 강개(慷慨)하고 통곡하여 말하기를 국가(國家)는 신두타(辛頭蛇)로부터 궁중(宮中)을 혼탁하여 문란시켰던 까닭에 국가(國家)의 기강(紀綱)이 점차 문란하여 졌고 왕도정치(王道政治)가 드디어 해이해져서 조정의 신하들은 중임(重任)에 있는 자가 그 책임을 말할 수 없게 되었구나 이로부터 캄캄한 밀실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일이 경각(頃刻)에 있음을 잊을 수 없더니 1374년(공민왕7년)에 이르러 홍윤(洪倫)과 최만생(崔萬生)이 왕(王)을 살해하는 변란(變亂)이 있었고 이인임(李仁任)이 견미(堅味) 등으로 신우(辛禑)를 임금으로 세워서 중외(中外)에 풍문(風聞)을 따라 부화뇌동(附和雷動)케 하니 온 조정이 어지러워 졌는데 유독 공(公)만이 역설(力說)하여 옳지 못하다고 말하기를 신우(辛禑)라는 자는 미승(迷僧) 신돈(辛旽)의 종인 반야(盤若)의 몸에서 출생(出生)한 자이다. 어찌 王氏(왕씨)의 조정에 마땅하리오 라고 하면서 힐란하게 비판하는 상소문 수천언(數千言)을 올리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용맹스럽게 은퇴하는 뜻을 두어 전리(田里)에서 은거하여 여생을 보낼 것을 간구하여 회천(懷川)에 돌아오니 때는 1374년 공민왕 23년 갑인년(甲寅年)이었다. 그후 왕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모두 나가지 아니하였다. 그가 생애(生涯)를 마칠 무렵에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정석(正席)하여 자제(子弟)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선왕(先王)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어도 그 은혜를 갚지 못하고 구차이 생명(生命)을 보존하였으니 선왕(先王)의 죄인(罪人)이구나. 무슨 면목으로 선왕(先王)을 지하(地下)에서 알현(謁現)한단 말이냐. 너희들은 마땅히 내 뜻을 본받아서 내 선조(先祖)의 임금 섬기는 마음으로 마음을 일삼는다면, 사람 신하된 의리를 지켜 소요부(邵堯夫)가 말하는 하늘에 우러러 보나 땅을 굽어 보나 부끄러움 없는 교훈을 면하게 되리라 라고 하면서 말을 마치는 순간에 졸(卒)하였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고주박씨(固州朴氏)이니 이는 선행록(善行錄)에 기록되어 있다. 묘(墓)는 회덕군(懷德郡) 동은곡(東隱谷) 후산(後山) 송계암(松契岩) 즉 지금의 대전(大田) 동구(東區) 마산동(馬山洞) 관동(寬洞)에 있다. 《자료 : 懷川君 遺事, 大田市史, 大德郡誌》 《崔槿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