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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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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명 황세정(黃世楨)
생몰년대 1622(광해군14)∼1705(숙종31)
출생지
출처
조회 4482 작성일 2003-10-23
첨부
상세정보 조선시대 문관(文官). 자(字)는 주경(周卿)이고 호(號)는 제곡(霽谷)이며 본관은 회덕(懷德)이다. 회덕 황씨는 시조 락(浴)이 중조(中朝)의 재상이었는데 동쪽으로 옮겨와서 회덕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관향(貫鄕)을 삼았다. 그뒤 후손들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다가 조선초에 회천위(懷川尉) 유(裕)가 나왔다. 그의 시호(諡號)는 양도(良悼)였으며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의 현손(玄孫)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삼계(三戒)인데 곧 제곡의 증조이다. 조부는 영남(穎男)이니 장악원주무(掌樂院主簿)였고, 부친은 덕윤(德潤)인데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파직을 당하고는 병으로 일찍 돌아갔다. 모친은 고령박씨(高靈朴氏)인데 선교랑(宣敎郎)을 지낸 공(珙)의 딸이었다. 제곡은 태어나면서부터 똑똑하고 뛰어나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나 3세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종숙모(從叔母) 조씨를 따라 고향 회덕에 내려와 자랐다. 6세 때에 처음으로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1년만에 십구사(十九史)를 모두 읽어내니 선생이 그의 뛰어난 재주를 크게 칭찬하였다. 그 당시 모친이 서울에 있었으므로 오르내리며 봉양했다. 9세에는 당시의 재상인 최명길(崔鳴吉)에게 강목(綱目)을 배웠는데 행동거지가 이미 엄연하고 의젓하니 최명길이 크게 될 그릇이라고 칭찬하였다. 마침 중국에서 사신이 오매 그들을 위한 광대들의 놀이판이 벌어져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앞다투어 몰려갔으나 홀로 구경하지 않고 반듯이 앉아 글을 읽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12세에 모친의 명령으로 전심하여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이때부터 스승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주야로 가르침을 받아 모든 성리서(性理書)에 널리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타고난 자품이 빼어났으므로 무릇 의리가 얽혀 있어 어려운 것에 대하여 그 이치를 얻어 들어 의심하거나 어려웠던 문제점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로 기뻐했다. 어른을 섬기고 손님을 접대함에 있어서 반드시 공경하고 조심스럽게 하였으며, 나아가고 물러서며 인사하는 법도가 예의에 합당하였으므로 선생이 어느 제자보다 아꼈다. 그리고는 동춘선생의 큰아들 광식과 함께 신독재(愼獨齋)에게 나아가 전에 듣지 못한 것들을 배웠다. 이에 앞서 우암(尤庵)이 동춘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도학을 강론하였으므로 그를 선생으로 모시면서 여러가지를 물어보아 깨우친 것이 많았다. 일찍이 기성면(杞城面) 성전(星田)의 골짜기를 좋아하였는데 우암도 그곳이 평소 자신의 마음에 맞는 곳이라고 하여 함께 옮겨 살게 되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그 친밀한 사이에 끼어들지 못할 정도였다. 1656년(효종7년)에 여러 선비들이 그를 나라에 추천하여 영릉참봉(英陵參奉)과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했으며 3년 뒤에 다시 교관(敎官) 벼슬을 내리니 이 때는 모친이 너무 늙어있어 제곡이 벼슬을 수락하였다. 그러자 당시의 판서였던 민정중(閔鼎重)이 맨 먼저 자제를 보내어 배우게하니 이로 인하여 학생들이 많이 모였다. 학생들을 지성으로 가르쳐서 목표를 성취하였으니 근세 이래로 교관의 직을 맡아 책임을 다한 사람 가운데 그 같은 이가 없었다. 그 뒤 벼슬을 버리고 연기(燕岐)에돌아와 조그만 집을 마련하였는데 우암이 제곡유거(霽谷幽居)라는 네 글자를 써 보낸 일이 있자 이 것으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 윤휴(尹 )와 가장 가까왔으나 윤휴가 기해년 복제의 문제로 우암과 동춘을 모함하여 우암은 북쪽으로 유배가고, 동춘 역시 관직을 추삭(追削)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크게 놀라 두 선생의 억울함을 알리고 반대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로 인해 곧바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숙종 6년(1680) 유배지에서 돌아와 의녕고주부(義盈庫主簿)를 지내다가 공조좌랑(工曹佐郎)이 되었다. 그 뒤 연풍현감(延豊縣監)으로 재직하였는데 이 때 백성들을 자애롭게 다스리니 백성들이 그 은혜를 칭송하였으며 대신들도 모두 제곡이 크게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그 당시 우암선생은 처음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붙잡아 오라는 어명이 내렸는데 이를 보고 애통해하며 박절함을 이기지 못하여 상소문을 지어 자신이 대신하고자 하였는데 한 친구가 이것을 만류함으로 임금께 호소하지 못했다. 우암이 돌아오는 길을 맞으려 주야로 달려가니 드디어 해남(海南)의 진두(津頭)에서 선생의 일행과 만났다. 선생을 보고 눈물이 비오듯하나 선생이 그러한 모양이 부녀자와 같다고 책망하였다. 드디어 장성(長城)에 이르러 밤에 선생을 모시고 잤다. 정읍(井邑)에 와서 선생이 사약을 받고 돌아가자 동춘선생 때와같이 상복을 입었다. 1694년(숙종20년)에 민비(閔妃)가 복위되고 장씨(張氏)가 희빈으로 강등되어 그동안 세상을 미혹하게 하였던 무리들도 없어지게 되자 서울에 올라왔는데 마침내 조정에 나가던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를 만났다. 그는 함께 국사를 의논하자고 요청했지만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하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해 가을에 문생 민상공 이하 여러 사람들이 이끌어준 공적을 상소하여 벼슬을 청하니 이에 특별히 통정(通政)의 계급을 내리고 이어 첨추(僉樞)의 벼슬을 하사하니 이때 나이가 78세였다. 다른 사람들과 일을 도모하지 않고 금강산에 유람 갔는데 걸음걸이가 나는 듯하니 중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며 우암 뒤로는 처음 보는 일이라고 하였다. 1701년(숙종27년)에 판서 김창집(金昌集)이 임금께 아뢰기를 「황아무개는 평생 동안 배움을 실천함이 돈독하고 나이도 높으니 마땅히 포상하여야 합니다」라고 하니, 또한 가선(嘉善)을 더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내렸다. 1704년(숙종30년)에는 이해가 명나라가 멸망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므로 조정에서는 옛날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단을 설치하고 친히 제사지내 왔으며 또한 묘당(廟堂)을 세우고자 논의하였던 것인데 신하중에 고례(古禮)에 없는 일이라 하여 논의가 분분하였다. 이때 공이 분연히 상소를 올려, 미자(微子)가 제기를 싸안고 떠나 이르른 곳에서 은나라의 제사를 지내고자 하였고, 주자가 강목(綱目)의 한기(漢紀)에서 군국(郡國)으로 하여금 태종(太宗)의 사당을 세우도록 하였음을 논거로 하여 묘당을 세움이 조금도 거리낄 일이 아님을 밝혔으므로 의논은 바로 잡아졌지만 실행되지 못하였다. 1705년(숙종31년) 2월 23일에 돌아가니 향년 84세였다. 마침내 체력이 노쇠하여 병세가 나타나자 도연명(陶淵明)의 승화귀진(乘化歸盡)이라는 구절을 쓰고 밤이 되자 모시는 이들에게 「어찌 아침이 이리 늦는가」 묻고 닭이 울때에 편안히 돌아갔다. 4월에 전의(全義)의 사촌(沙材)에 부인과 합장하였다. 공은 집안에서의 행동이 매우 지극하여 항상 어릴 때 부친이 돌아갔음을 지극히 애통하게 생각하였으며 어버이의 뜻에 맞도록 하기 위하여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형 섬기기를 마치 부모를 섬기듯 하였으며 처자식을 대하고, 노비를 부리는 일에도 윤리가 정당하고 아끼고 사랑하였으니 모두 본받을 만 하였다. 어려서부터 동춘을 스승으로 모셔서 모든 행동거지가 마음으로 알고 몸소 행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진실로 믿고 존경하여 받듬이 늙도록 한결같았다. 매번 스승의 성덕을 밝히고 드러냄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유사(遺事)를 정리하여 문집의 끝에 붙여 놓았으며, 동문의 벗들과 더불어 선생의 연보를 작성하였다. 평생토록 스승으로 자처한 적이 없었으며 배우러 오는 이들을 정성껏 가르치기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주변의 되든 선비들이 그를 추천하여 산장(山長)으로 삼았다. 학생을 가르치고 서원을 이끌어 감에 한결같이 동춘 우암선생의 법을 따랐고 사람을 믿음으로 대하여 잘한 일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초야에 묻혀 살았지만 조정의 잘 잘못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 끼니를 걸으면서도 몇몇 학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부인은 연안 이씨 찰방(察訪) 훤(煊)의 딸이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2남은 염·첨이며 최수석(崔壽石)과 송징원(宋徵遠)과 홍우천(洪禹天)이다. 《자료 : 李縡撰 霽谷公墓碣銘》 《金善祺》